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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Mar 11. 2024

양념의, 양념에 의한, 양념을 위한 방앗간

당시 아흔이 훌쩍 넘긴 할머니가 송산리를 떠나 요양병원에서 몇 해를 지내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나마 정신이 온전하시고 미동이라도 하실 수 있을 때 무언가를 보여드려야겠다 싶었던 우리 아빠였다.


어차피 농장의 주력으로 고추를 잡았고 직접 가루를 빻을 수 있도록 공장을 만드려 했던 계획이 서둘러졌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만 더 여유롭게, 더 꼼꼼하게 준비했다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던 공간이라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서두른 덕분에 큰 일을 해냈던 것 같다. (건축자재비, 인건비가 갈수록 오르기도 했고)


우리 공장의 주 목적은 고춧가루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년 중에 겨우 세 달 남짓 사용하는 것이 아까워 기름착유기도 들였다. 이 역시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나와 엄마는 기름은 생각지도 못 했는데 아버지의 채찍 덕분에 어쨌든 참기름과 들기름도 생산목록에 추가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따라 이웃동네 방앗간에서 참기름을 짜오던 적은 많은데 내가 직접 참기름을 만든 적은 없었다. 기계사장님께 참기름 짜는 방법을 배웠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일반적이고 평범한 방식은 '진도농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참기름, 들기름도 진도농부 다울 수 있을까? 고심 끝에 가장 진도농부다운 방식으로 우리만의 기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니까, 진도농부의 오랜 고객님들과 함께 기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기름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마치 커피처럼 어느 온도와 습도에서 곡물을 로스팅하고 추출하는지에 따라 맛과 향, 색이 완전히 달라졌다. 같은 날, 같은 깨를 같은 기계에서 짜더라도 다 달랐다. (방앗간을 시작한 지 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똑같은 기름을 짜는 것은 어렵다)


같은 참기름인데 어떤 것은 약간 쌉쌀한 맛이 나고 또 어떤 것은 생땅콩처럼 비릿한 맛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가지 조합의 변수로 수십 병의 참기름을 짜냈고 10년 넘은 진도농부 단골고객님들께 보내드렸다.


그렇게 시작한 블라인드테스트에 참여해주신 고객님들은 정말 성심성의껏 피드백을 주셨다. A 참기름은 색도 향도 맑은데 너무 참기름맛이 안 나요. B 참기름은 많이 태운 것 같네요. C 참기름은 옛날에 엄마가 시골에서 보내주시던 맛이 나네요.



그렇게 두 달 정도의 시간과 참깨값으로 200만원 가까이 쓴 결과 진도농부만의 참기름 레시피가 탄생했다. 깨를 높은 온도에서 겉만 빠르게 태우는 것이 아닌,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속까지 골고루 익도록 은은하게, 천천히 볶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렇게 하면 작업속도도 훨씬 느리고 전기세도 많이 든다. 무엇보다 착유량이 적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참기름을 한 번 드신 분들은 절반 이상 재주문해주고 계신다. 지난 번 참기름이 너무 맛있어서 선물용으로 또 구매하신다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참기름보다 더 중요한 역을 맡고 있는 고추방앗간은 대기업에서 쓰는 큰 설비를 들였다.


사시사철 구할 수 있는 마트가 아닌, 농가에 직거래해서 제철에 나오는 '두벌고추(보통 한 번에 세 번 이상 고추를 수확하는데, 그 중 두 번째로 딴 고추. 가장 품질이 좋다고 알려짐)'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고춧가루는 식품 그 이상이다.


이들에게 고춧가루는 내 가족의 행복이자 주부로서의 자존심이다. 우리 농장에서는 손님들마다 원하시는 고춧가루를 받아보실 수 있도록 예약상담을 하고 있다.


지역과 취향마다 김장할 때 쓰는 고춧가루의 '굵기'도 다르다(보통 서울쪽이 상대적으로 더 곱고 충청도 쪽이 거칠다). 고추씨를 빼면 색이 확 진해지고 고추씨를 더 넣으면 고추기름이 더 들어가 부드럽고 담백해진다. 우리 고춧가루는 기본적으로 '순한맛' 종자인데 매운 것을 좋아하시면 청양고추도 함께 주문하신다.


이렇게 한 분 한 분 상담하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 만큼 신경써야 할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까다롭게 주문을 받는 나를 보면서 주변에서는 바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절임배추도 절임 정도, 배추의 크기, 푸른잎의 양 등을 커스터마이징해드리는데 다들 뜯어말리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분 한 분 이야기를 나누며 씨앗을 심듯 관계를 심고 가꾼다. 그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우리의 식구들을 늘리고 있다.




정말 큰 맘먹고 더 큰 꿈을 꾸며 공장을 지었을 때, 가족들과 몇날 며칠에 걸쳐 이름을 지어주었다. 루루방앗간도 있었고 송산리고추방앗간도 있었다.


결국 정해진 이름은 '제철양념제작소'이다. 여름의 고추와 참깨, 가을의 들깨를 활용한 양념을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리 할머니 '허양념' 씨의 이름을 넣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공장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농사를 시작했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농사를 물려준 것도 할머니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의 곁에 할머니는 안 계시지만 이 공간에서 점차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래도 양념씨가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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