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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Mar 25. 2024

정답은 없지만 이것도 나다.

내가 뭔가를 봤다고 하면 우리 아빠는 긴장을 했다. 난  뭐든 쉽게 꽂혀서 한창 들들 볶다가 또 금방 싫증을 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랬고 물건도 그랬고 심지어 종교도 그랬다.


그러니 우리 농장이 집중해야 하는 그 한 가지를 정해야 했을 때도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렸다. 미니밤호박 찔끔. 자색고구마 찔끔. 방울토마토 찔끔. 결국 돌고 돌아서 고춧가루와 절임배추.


노지농사는 못 하겠다. 스마트팜도 한 번 기웃거려보고. 앞으로는 체험농장이 대세라는데? 치유농장 교육도 들었다가. 농장에서 체험도 해봤다가. 농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동생이름으로 카페도 오픈했다가 두 달만에 철수.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도 도전한다. 주말장터 기웃거렸다가 반년만에 탈퇴.


우리 엄마는 이제 제발 한 가지에 집중하라며 내게 울먹거린다. 나와 아빠가 잔뜩 벌여놓은 뒷처리는 늘 엄마의 몫이었으니 울먹거릴만도 하지.




그래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제대로 잘 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기는 한 것일까?


사춘기때도 하지 않았던 고민을 서른이 되어서야 시작한 나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만큼 어느 날은 뇌의 주름이 찌릿할 정도로(그걸 느낄리는 없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이 고민했다. 


나도 남들처럼 빨리 자리잡고 싶어. 나도 남들처럼 잘 살고 싶어. 나도 남들처럼 정답을 찾고 싶어.




이 세상에 '빨리' 자리잡은 사람은 없고(성과 뒤에 보이는 치열한 준비들을 생각한다면 '빨리'는 없다) 무엇보다 정답은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된 나다. 아빠가 보기에 나는 여전히 엉망진창 울퉁불퉁하지만 이 모양도 결국 나다. 아빠에게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내가 나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심지어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할 만한 하루하루를 의식적으로 살아내려 했다. 옷 입는 것도 그렇고 말 하는 것도 그렇고 글을 쓰는 것도 그렇고.


그랬더니 오히려 결과가 좋았다. 가장 빠르게 성과가 나타난 것은 인스타그램이었다.


조금이라도 멋져보이려고, 있어보이려고 했던 허세를 버리고 내가 편한 대로 썼다. 브랜딩이니 마케팅이니 이런게 아니라 우리 농장의 있는 그대로, 우리 가족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내보냈다. 화려한 편집 그런건 할 줄도 모르고 내 폰과 손은 똥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반응이 나왔다.


그 반응들은 그대로 판매로 이어졌다. 언제부터인가 판매글을 올리기가 무섭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하며 아쉬운 소리를 곧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잘 파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다보니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 이거해보자. 저거해보자. 앞으로는 이렇게 할거야. 저렇게 할거야.


분명 몇 해전과 비슷한 행보인데 이제 더 이상 아빠는 나를 냄비처럼 금방 식는, 쟤 또 시작이네, 하고 보지 않는다. 그래, 우리딸 잘 한다. 하고 싶은대로만 해. 아빠가 다 해줄게.




요즘도 나는 머리가 터질 것처럼 생각을 한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생각이 더 이상 머릿속의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거다. 물론 이 생각은 어느 때처럼 또 모양을 바꾸겠지만 그게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이 세상에 정답은 없고 내 인생에도 정답은 없으니까. 나는 또 울퉁불퉁 오만가지 생각들을 잔뜩 하고 또 잔뜩 실행하고 또 잔뜩 잔소리도 듣겠지.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두렵지 않다.


나는 어느 때보다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




지금까지 그루루의 [내 사주엔 흙이 없다]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주 월요일에 글을 쓰는 시간동안 저와 우리 농장을 돌아보는 시간들은 참 따뜻하고 깊었습니다.


열심히 봄의 농번기를 보내다가 잘 준비해서 다음 연재로 찾아뵐게요.

그루루의 농사일상이 궁금하신 분들은 인스타그램 @jindomiss로 놀러와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jindom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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