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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Mar 04. 2024

난생 처음 빚을 내었다. 그것도 2억을.

부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주제를 파악하게 되었고, 부모님의 그늘을 조금씩 벗어나야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더 이상 나의 깡통소리 가득한 텅빈 허영심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음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 농장의 재배품목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토마토, 고구마, 브로콜리 등 스무 가지가 넘는 채소와 보리, 수수, 조 등 열 가지가 넘는 잡곡을 키웠다.


한 번은 하우스에서 스무 가지 넘는 모종에 물을 주고 계신 아버지께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지 여쭤보았다.


배추를 시작으로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농산물을 택배로 팔게 된 부모님께서는 그 후로 그 분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심어주기 시작하셨단다. 토마토 있나요? 고구마 있나요?


거기에 우리 아버지의 엄청난 호기심(TV에서 한창 인디언감자가 유행인데 진도에서도 잘 자랄까? 방울양배추라는 것이 있네, 한 번 심어볼까?)이 더해져 수십 가지의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지난 화에도 밝혔지만 나는 경영학 전공생이 아니던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을 높이는 것인데 우리집의 비효율 끝판왕의 이유는 단연코 수 많은 작물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해 우리도 '대표작목'을 정해야 했다. 이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힘들어도 계절마다 다양한 농사를 지어야 손님들의 이탈도 막고 무엇보다 현금회전이 쉽다는 것이 아버지의 의견이었다.


백번 옳은 말씀이었지만 그로 인해 우리 식구들의 정신적, 육체적 체력은 바닥나고 있다는 점도 강력하게 어필했다. 그때 막 군대를 전역하고 진도로 합류한 남동생이 똑같이 농사짓는 집안의 친구들은 겨울에 스키장에 놀러갈 수 있다며 하소연을 했다. 우리 가족은 스키장은 커녕 겨울이 가장 바빴기에 정말 쉴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다. 봄에 번 돈으로 여름 작물농사를 준비해야 했으니 일은 많고 돈은 안 남았다. 그나마 우리 부모님이 지금 정정하시니 망정이지, 언제까지 이렇게 우리 가족이 버틸 수 있을 지 몰랐다. 무서웠다.


처음에 아버지는 작목을 줄이는 것을 결단코 반대하셨지만 본인도 점점 농사가 힘에 부치셨던지 나중에는 나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표작물' 찾기여정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첫 번째 후보는 대파였다. 그 때 우리가 [여섯시 내고향]에 대파로 나간 덕분에 우리것, 이웃것 할 것 없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았다. 우리 것도 다 팔아서 이웃삼촌이 매일 트럭으로 한 차씩 대파를 가져다주었다. 마침 대파는 진도에서 밀어주는 특산품이기 때문에 구하기도 쉬웠다.


그래, 대파농장이 되는거야. 그럼 우리 금방 부자되겠는데? 했던 생각이 우스울 정도로 다음 해부터 대파는 3년 동안 '똥값'이었다. 우리와 계약재배로 대파를 심어주었던 마을 아저씨의 밭 한 조각도 다 팔지 못 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래, 대파는 가격등락이 너무 심해서 패스다.


다음 후보는 미니밤호박이었다. 그 해는 추석이 유독 빨랐다(9월 초). 미니밤호박은 주로 여름에 나오는데 사과나 포도처럼 미니밤호박을 추석선물로 팔기 위해 600만원이나 들여 전용패키지를 맞췄다.



패키지에 공을 들인 만큼 처음에는 잘 팔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도, 패키지를 디자인해준 업체에서도 미니밤호박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가 부족했다. 무조건 예쁘고 튼튼하게 만들 생각으로 이 생물이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신나게 택배로 보낸 미니밤호박들이 도착해서 상자를 열어보면 절반은 썩어가는 것이다! 직접 먹기 위해 산 것도 화가 날텐데 귀한 분께 선물용으로 보내드린 것이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지만 분명 많은 것을 배웠으니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가득 쌓여있는 미니밤호박 선물세트를 우리 아버지는 나의 반성을 위해 버리지 못 하게 하셨다)




그 밖에도 이런 저런 농산물 후보가 이런 저런 이유로 탈락이 되었다. 남은 것은 돌고 돌아 고춧가루와 절임배추였다.


고객 덕분에, 고객의 믿음 덕분에 성장한 진도농부였고 가격보다 품질과 믿음이 더 중요한 품목이 고춧가루와 절임배추였다. 그래서 선택했다.


이왕 고추에 집중하기로 했으니 과감하게 고춧가루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일전에는 '건고추'로 보내드리거나 고객님의 요청으로 앞마을 방앗간에서 가루로 빻아서 보내드렸다. 굳이 큰 돈 들여 우리만의 고춧가루 공장을 만든 이유가 있었다.


우선 시골방앗간보다 더 깨끗한 환경에서 고춧가루를 빻아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게 우리 고객님들에 대한 예의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고객님들의 요청대로 '커스터마이징' 고춧가루를 제작해드리기 위해서였다.


고춧가루를 마트가 아니라 굳이 철에 맞춰 농장에서 구매해주시는 분들은 직접 김장을 하시거나 집에서 요리하는 빈도가 많은 분들이다. 집집마다 입맛과 취향이 다 다른데 똑같은 고춧가루를 보내드릴수는 없다. 저마다 고춧가루의 맛과 굵기, 색깔 등 원하는 취향이 모두 다르다.


부모님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생색'을 내지 않으셨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방앗간의 차별점이자 마케팅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의 커스터마이징 고춧가루 방앗간 '제철양념제작소'가 탄생했다. (참고로 우리 할머니 '허양념' 씨의 이름에서 따온 이이다)



그렇게 부모님이 아닌 나만의 무언가를 하기 위해, 부모님때보다 더 나은 농장의 경제상황을 만들기 위해 나는 난생 처음으로 대출을 받았다. 그것도 2억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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