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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인 Apr 20. 2022

우크라는 그럴 수 있어 근데 미국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최근 우크라이나가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군수 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이미 헬멧 같은 비살상 물자를 지원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것은 비살상 물자가 아닌 살상 무기, 그러니깐 우리가 보유한 러시아제 T-80 전차를 포함한 150~200여 종의 전쟁 물자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여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이를 또다시 거절했다. 그러자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는 국내 미사일 생산 업체인 LIG넥스원을 직접 방문하려다 실패했다. 우크라이나의 절박함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보다 괘씸한 것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를 압박한 미국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지금부터 우리는 왜 우크라이나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지 또 우리는 왜 미국을 괘씸히 여기는지를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해보려 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이전까지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더 이상 패권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공석이 된 세계 최강국 자리를 노리는 두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때부터 시작한 미국과 소련의 총성 없는 전쟁을 차가운 전쟁, 즉 냉전이라고 한다.

냉전 시기에는 모든 것이 양분됐다. 민주주의의 미국 편과 공산주의의 소련 편으로 말이다. 양분된 것의 대표적인 예는 불행히도 한반도였다. 한편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무기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나라는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제 무기를 사거나 소련제 무기를 사야만 했다. (두 나라가 최첨단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대개 민주주의 국가들은 서방제 무기를, 공산권 국가들은 소련제 무기를 수입했다. 우리나라는 당연히 서방제 무기를 수입했다.

1990년 우리나라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소련에 돈을 빌려줬다. 그런데 일 년 뒤인 1991년 소련이 망했다. 우리는 한순간 돈을 떼이게 된 꼴이 됐다. 그런데 다행히도 러시아가 소련의 모든 것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우리가 빌려준 돈을 갚긴 하겠지만 일부는 돈이 아닌 현물로 갚겠다고 했다. 돈만 받아도 감지덕지였던 우리는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러시아에 요구한 현물은 다름 아닌 러시아제 무기 (구소련제 무기)를 포함한 방산 물자였다. 러시아도 별 고민 없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시작한 러시아제 무기 도입 사업을 일명 불곰사업이라고 한다.

불곰사업의 결과는 뭐랄까, 휘황찬란하다. 불곰사업 결과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서방제 무기와 러시아제 무기를 모두 보유한 나라가 됐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러시아제 무기를 이리 뜯고 저리 뜯으면서 엄청난 기술 발전을 이뤄냈다. 현무 미사일과 K2 전차 등을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곰사업이 있다. 게다가 불곰사업 계약서에는 우리가 러시아의 허락 없이 러시아제 무기를 제3국에 수출할 수는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도 우리 눈치를 보느라 북한에 좋은 무기를 줄 수 없게 되었다. 북한 편이었던 러시아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국방력을 끌어올리고 반대로 북한 국방력은 끌어내리는 환상의 일석이조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불곰사업은 한 마디로 축복이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에 군수 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특히 전차나 미사일 같은 강력한 무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제 무기를 사용하는 국가다. 러시아제 전차를 가진 나라는 동유럽 국가 외에는 거의 없다. 물론 거의 없을 뿐이지 전혀 없지는 않다.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제 무기를 가진 대한민국이 있으니. 이리하여 우크라이나는 우리에게 살상용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제 전차 따위를 지원한다면 러시아와의 계약을 어기는 것이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는 추후 북한에 강력한 무기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뼈아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풍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요청한 무기 리스트에는 우리 정부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무기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무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나라는 우리와 군사 동맹국인 미국뿐이다. 즉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우리 군사 정보를 흘린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즐기고 있다. 세계 최강국 위치를 넘볼 수 있는 잠재적 적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길 바란다. 그러니 우크라이나에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바람과는 달리 유럽 국가들, 특히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 제재에 크게 동참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이미 러시아 천연가스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미국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얼마나 괘씸한가. 만만한 게 우리라니.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절박하다. 그러니 물불 가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의 자세를 백 번, 천 번, 만 번 이해한다. 설사 그가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면서까지 우리를 물고 늘어진다 해도, 많은 사람이 그를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불과 70여 년 전 전쟁을 겪은 나라니깐. 하지만 미국의 행동은 정말 불쾌하다. 아무리 우리와 군사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남의 전쟁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가만히 있는 우리까지 건들이다니. 다시 한번 국제 사회의 냉혹함을 느낀다. 우리에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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