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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엄마 Apr 05. 2019

엄마의 61번째 생일

미인박명이라지만, 그녀가 이제는 행복하기를

오전 11시. 일하는 시간에 연락을 잘 안 하는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디 아픈가 하고 다급히 읽어보니

"-시험은 결정이 없는 순간적인 것이다-너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일기에 여있더라. 똑똑하기도 하지."

일을 하다 말고 어린 시절 나의 일기장 이야기를 꺼낸 엄마. 처음엔 전혀 똑똑하지도 않은 말을 똑똑하다 여긴 점이 영락없이 고슴도치 엄마 같아서 웃다가 나중에는 얼마나 무료했으면 장롱 위의 먼지 쌓인 박스를 굳이 꺼내어 일기장을 봤을까 싶어 잠깐 먹먹했다. 퇴근 후 집에 온 남편과 저 문장을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해보다가 그냥 '책 좀 읽던 9살 어린이의 멋진 척'으로 결론지었다. 내 딸이 9살이 되면 일기에 어떤 말을 쓸까. 내 딸이 시집가면 나는 혼자일까 아니면 남편과 함께일까 등등 여러 생각들이 스쳐간다.


 이틀 후면 엄마의 61번째 생일이다. 엄마는 아빠와  때는 제대로 축하받아본 적이 없고 나와 단둘이 살아온 긴 세월에도 초반엔 너무 없이 살아서 생일이라고 해봐야 치킨 하나 시켜먹는 게 전부였다. 20대 중반이 넘어서야 엄마를 모시고 나들이를 나가 외식을 하고 선물을 해드렸다. 엄마는 보다는 분위기였다. 깨끗하고 반듯한 느낌이 드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들어서면 해사하게 웃곤 했다. 그 모습이 좋아서 엄마의 생일만큼은 그럴싸 레스토랑만 고집했다. 엄마는 늘 순대국밥이나 우동 사주면서 식구가 엄연히 셋인데 두 개만 시키는가 하면, 자기는 5분도 안 돼서 다 먹고 벌떡 일어나 식당을 들락날락 거리며 빨리 먹으라고 버럭대는 아빠에게 질려버려 무조건 분위기를 따지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가끔은 그런 외출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준 이모도 함께였기에 손 떨릴만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엄마의 생일을 치루고 회사에서 열흘간 삼각김밥..그래도 좋으다. 출처: YES24블로그

 그렇게 전혀 구리지 않은 생일을 보내면서도 옆 자리의 아빠, 엄마, 자식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가끔 힐끗거렸다. 전형적이라는 말 식상하고 매력 없다는 말처럼 느껴져 좋아하지 않는데 가족의 모습에서만큼은 전형적이고 싶었나 보다. 최선을 다해 모셔도 엄마의 생일은 만년 B+학점에 그치는 기분이었는데 결혼 후 남편과 손녀딸까지 함께하이제야 꽉 찬 느낌이 든다. 지난 엄마의 환갑 때  언제나 곁에서 엄마를 지켜주고 있는 이모, 이모부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했을 때 엄마는 큰 숙제를 해결한 아이 같았다. 엄마  숙제가 너무 려워 오래 걸리는 동안 부쩍 버린 언니들과 형부들 둘러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럼에도 엄마 비어 보이는 표정과 말이 마음에 걸릴 때가 . 엄마는 우리들과 있을 때면 손녀딸의 애교와 재롱에 한껏 웃다가도 일순간 멍해지는가 하면 순하고 영특한 손녀딸에 대한 감탄 어린 과 '너희가 잘 살아서 좋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때가 많다. 나랑 둘이 잘 살아야 한다는 유일했던 목표 사위에게 넘기고 나니 바람 빠진 탱탱볼처럼 생기를 잃 다. 아무리 이제 노인의 축에 들어선 나이지만 내가 시집을 가고부터는 너무 자주 .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라서 이럴 때면 여간 답답한 게 아닌데, 정밀검사를 해보니 결국 신경성의 문제가 가장 컸다. 엄마는 남편과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면 명절에 나랑  갔던 이야기, 여기저기 나들이를 다닌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한다. 둘이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친구 여행 다닐 때인데 따님이 착하다며 칭찬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남편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조만간 저희랑 다 같이 좋은 데로 여행 가야죠.'라고 말한다. 쯧쯧. 우리 엄마는 나랑 단둘이 여행 가고 싶다고, 딸에게 시간 좀 내어주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임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엄마 조만간 또 단둘이 여행갑시다. 출처 : photocanon.tistory.com

  지난 구정 때 엄마가 우리 집에 2박 3일을 머무는 동안, 첫째 날 밤에는 손녀딸과 오붓하게 잠든 엄마는 둘째 날 밤에 남편이 딸을 재우다 잠이 들어버려 자연스럽게 나와 자게 되었다. 처음엔 '너 말고'이런 반응이던 엄마는 점차 낮 동안 사위 옆에 봉인되어 있던 자신을 해제하고 나의 단짝 친구로 돌아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다가 경박하고 촌스러운 웃음도 서슴지 않고 방출했다. 순간 잠이 몰려와 눈을 잠시 감았는데 엄마는 내가 잠이 든 줄 알았는지 내 볼을 쓰다듬다가 돌아누웠다. 엄마가 내 볼을 만지면 엄마와 나의 지나온 모든 삶이 촘촘한 바늘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손 끝이 닿아도 좋다는 연애가 있다면 손 끝만 닿아도 저리고 아픈 엄마와 딸 있다. 잠을 설친 나와 다르게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엄마는 얼굴이 뽀얗게 피어올랐다. 엄마는 '요 근래 들어 가장 잘 잤다.'라고 말했다. 처음 엄마와 둘이 살기 시작했을 때 방도 좁고 내가 아프기도 해서 이모가 사준 침대 하나에서 같이 잤는데, 형편은 매번 같아서 계속 그렇게 그 침대에서 같이 잔 게 무려 16년.  침대에서  자는  아직도  이상한 기분이 드나 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엄마의 베갯잇이나 이부자리를 더듬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 순간 엄마가 화장실이라도 간 경우는 일순간에 식은땀이 폭발하며 벌떡 일어나 엄마를 찾다가 안심하고는 했다. 거의 매일 , 엄마가 혼자 야반도주하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엄마에게는 아이를 두고 도망갈 만한 사연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내 경우는 사연이라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엄마로 산다는  '죄다 손해'라는 초점 벗어나까지 오래 걸렸다. 아이를 품고 낳고 2년 가까이 키우는 동안 도무지 다른 방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과 관심사를 다 내려놓아야 했을 때 불쑥불쑥 울화가 치밀었다. 이제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부터 그 울화는 잘 숨어 있다. 만약에 둘째가 태어난다면 다시 '짠? 오랜만이지?'하고 얼굴을 쳐들까 봐 두렵다.


 특히, 아이가 100일이 되기 전까지는 원초적 본능에 아주 취약한 미개인인 나로서는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지나간 것으로도 다행인 시간이었다. 산후도우미 분이 잠깐 계신 적이 있는데 본인 남편이 아이의 신생아 시절에 아이를 달래다 말고 침대에 던지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고 웃으며 말하실 때, 절대적으로 그 남편의 입장에 공감했다. 자고 먹는 기본 생활이 안 되는 와중에 젖은 무조건 물리고 짜내야 하다 보니 살아있는 신체기관은 젖 하나뿐인 듯한, 젖 같은 기분을 참지 못하고 모유수유는 금세 막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좀 더 자주 짜면 많이 나올 거라는 둥, 모유를 오래 먹으면 좋다더라는 둥, 듣기 싫은 말들을 자꾸 해댔다. 남편은 점점 적응보다는 극단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보며 처음에는 달래주다가 나중에는 모성애가 없다는 둥, 엄마 자격이 없다는 둥, 자꾸 둥둥거렸지만 아기를 사람답게 키우기 전에 나부터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남편이 다 이렇게 엄마로 살아가고,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 조금만 버텨보자며 죄다 맞는 말을 해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겠어서 화가 치밀었다. (얼마 전 올린 글에도 쓴 말이지만, 너무나 맞는 말을 들으면 화부터 난다.)


 최근에 잘 먹던 아이가 잘 안 먹어서 꽤 스트레스를 받다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니

 "야, 한 시간이면 금방 먹는 거지. 넌 한 번에 두 시간 걸렸다. 그걸 지금 힘들다고 하는 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모는 엄마가 늘 내 배를 꾹꾹 눌러가며 밥을 먹이면서도 늘 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했다고 했다. 툭하면 아빠를 피해 언니네 와 있는 민폐동생 주제에 나를 잠시 맡겨두고 돌아와서는 '언니! 얘 밥 안 먹였어?'라며 앙칼진 소리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자기 아들들 알아서 먹으라 내버려두고 나를 끌어안고 밥을 먹인 이모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 엄마는 그 말들에 멋쩍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야 이거 좀 봐라!' 하면서 내놓은 이모의 사진 속 내 모습은 세 아이 중, 가장 많이 먹은 아이였다. 남편은 한 동안 잘 먹지 않는 애를 붙잡거나 아니면 내리 쫓아다니며 밥을 먹이고는 자꾸만 아이 옷을 들춰 배를 만져대는 나를 보고 정말 무섭도록 장모님과 닮았다며 놀렸다. 잘 먹여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어느 정도 먹이다 치워버리니 어느 순간 아이가 먼저 다가와 밥 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 아이가 어떤 선전포고를 하든 잘 내려놓는 엄마가 되고 싶다. 지가 안 먹어도 엄마가 먹여주니 안 먹는 것이고, 지가 안 해도 엄마가 극성을 부리니 스스로 뭘 할지 모르는 것이다. 아이는 발달과정에 따라 계속해서 또 다른 상황을 마구 던진다. 엄마 봐가면서 던지는 것도 아니고 어떨 때는 몇 개를 한 번에 던지기도 한다. 때로는 멋지게 받아쳐내고 때로는 제대로 맞아 정신 못 차리며 여기까지 왔다.


 엄마로서의 삶과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분리해놓고 두 가지를 다 잘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답이 없다는 것도 알아갔다. 육아와 관련된 모든 것의 답은 '내려놓는 것'이었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수없이 많은 것을 내려놓고 단 하나 남겨둔 것이 나란 사람일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험난한 결혼생활을 창피하게 여겨 친구도 멀리하고 사람도 거의 사귀지 않았다. 형제 및 친척들마저도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왕래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잠을 줄이고 스스로를 쥐어짜며 공부하는 이유 중에는 '나는 엄마가 본인 인생에서 단 하나 남겨 결정체'라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저 시집가서 자식 낳은 걸로 끝나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에요. 이꼴 저꼴 다 볼 줄 알아야 좋은 엄마에요.  출처 : mobile.twitter.com

 

 이모들의 옷을 얻어 입고 있는 엄마를 볼 때면 매번 사주지도 않을 거면서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번 엄마의 생일 선물은 엄마가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연한 노란색 봄 쟈켓과 연회색 바지로 준비했다. 엄마의 생일 종종 옷을 사줬지 이번  가장 화사하기 때문에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건 일종의 도전이다. 누구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엄마는 공장에서 입을 옷만 찾다 보니 대부분 옷이 칙칙하다. 요사스럽다고 핀잔 들을까 봐 조금은 걱정하면서 엄마 사진을 얼굴만 화면 가득히 확대해 옷에 대어보며 엄마의 생일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크게 확대해도 욕이 없는 엄마의 얼굴. 엄마와 찍은 사진을 보면 나이 차이가 30년 가까이 나고 엄마는 화장도 안 하는데, 나보다 예쁘다. 열 이면 열 모두 우리 엄마가 미인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그래요. 저는 아빠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끙.) 젊은 시절 엄마의 사진은 다들 감탄하면서 본다. 누가 배우 할 미모 아니랄까 봐 그렇게 신파극을 평생 찍었나 보다. 미인박명이라지만, 이제라도 엄마가 박하지 기를 바란다. 조금은 유별난 모녀지간이라 시집간 지 5년이나 된 딸의 자리를 여전히 허전해하는 우리 엄마. 딸 하 키워 시집보내 잘 사니까 됐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불쑥 전화했을 때 '그냥 있지 뭐.'라고 맥 빠진 말하지 말고, 내 전화받을 틈도 없이 신나는 나날이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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