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일이 몰렸다. 일상을 잘 붙들고 정돈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었을 때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연이어 맡게 됐고 그간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평화가 뒤흔들렸다. 하루의 끼니를 살뜰하게 챙기는 일도, 들숨과 날숨을 감각하려는 것도,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는 것도, 운동을 빼먹지 않고 챙기려는 것도 모두 흐트러졌다. 바쁘게 일하는 중간중간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여행들을 위한 가방을 쌌다.
휘몰아치는 마감을 끝내 놓고 며칠 동안 마음이 슬쩍 가라앉았다. 몰두해야만 하는 것들을 해치운 채 일상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건 도서관이다. 오랜만에 돌아본 동네엔 새 편의점이 생겼고, 익숙한 책들만 꽂혀있던 신착 도서 코너에도 새 책이 왔다. 예약 도서를 찾아와 몇 문단 정도 꼬빡 집중해서 읽었는데 부대끼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익숙한 운동을 했고, 일기를 썼다.
"아빠, 일은 왜 해야 할까요?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니 일할 이유를 잃어버렸어요."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일을 찾으면 되지"
어제는 태어나서 본 달 중 가장 큰 보름달을 만났다. 아주 밝았고, 지면 가까이 떠 무척 커다랗게 보였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 멈춰서 하늘을 향해 스마트폰을 가져다 댔다. 자전거를 타다 잠시 멈춰서 달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어머, 저거 진짜 달이 맞아요?"하고 말을 걸었다.
아주 천천히 오랜 시간 걷다 보면 서서히 머리가 맑아진다.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밝은 도시 숲에 커다랗고 환한 달빛이 비춰 아름다웠다. 계절이 또 한 번 바뀌면 새해가 찾아올 것이다. 어쩐지 지난했던 마음들을 모두 내려놓겠다 생각한다. 더 이상 입지 않는 옷 몇 가지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