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토 Jun 24. 2020

육아휴직과 조직개편

시금치 프리타타

양면을 구운 시금치 프리타타
냄비 뚜껑을 닫고 익힌 시금치 프리타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조직개편에 대한 메일 알람이 떴다. 분홍색 고무장갑을 벗고 회사 모바일 어플에 접속해보았지만 휴직자인 나는 메일 열람의 권한이 없었다. 접속 권한 해제 전에 어플의 알람 설정을 꺼놓았어야 했는데, 보지도 못하는 메일이 자꾸 오니 괜히 궁금해서 몸이 달았다.

휴직을 하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뭐 하나 결정된 게 없는 상태로 휴직을 하니 마음이 찜찜했다. 인수인계서 따위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육아휴직 동안 내 담당 업무를 어떻게 진행할지 확실히 정해진 게 없었다.

운 좋게도 회사는 육아휴직을 권고하는 분위기였다. 휴직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도 없었다. 팀 사람들도 나의 육아휴직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축하해줬다. 하지만 휴직으로 발생하는 업무 공백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논의였다. 팀에서는 팀 인원과 올해 업무 중요도를 고려하여 2020년 사업의 계획과 방향성을 세웠다. 내가 담당했던 2개의 업무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사실상 로우키(low key)가 되었다. 육아휴직을 앞둔 내겐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남아서 팀을 가꾸고 고생할 동료들을 생각해 나도 이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해당 업무를 만일 팀 내에서 진행하기 어렵다면 다른 부서와 논의하여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어떤 식의 논의가 이뤄질지는 조직개편 이후에 정해질 거니 지금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다들 조직개편 전이라 말을 아꼈다. 나는 잠자코 인수인계서를 작성했다.

당시 임신 말기의 아내에겐 자세히 말할 수 없어서 나는 혼자 끙끙대며 속앓이를 했다. 육아휴직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대체 무슨 업무를 맡게 될까. 지금 팀으로 돌아올 수는 있을까. 회사가 일부러 내게 불이익을 주진 않겠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육아휴직일 뿐인데도 이런데, 임신과 출산, 육아휴직으로 오래 직장을 떠나야 하는 여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물며 일터가 혹은 주변 환경이 육아휴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일을 그만둬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할까.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경력단절 여성 실태조사’에 따르면 6,020명의 설문조사 결과, 임신·출산, 양육, 가족 돌봄 등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이 전체의 35.0%라고 한다. 육아휴직 후 직장으로 복귀한 비율은 43.2%로 절반에 미치지 못하며, 다시 일자리를 얻기까지는 평균 7.8년이 걸렸다고 한다.

미혼이건 기혼이건 여자라면 경력단절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마음을 나는 오래도록 곱씹었다. 누군가가 경력단절이 두렵다고 하면 마음속 깊이 공감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몇몇 동료로부터 연락이 와서 조직개편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내가 하던 2개의 업무가 각기 다른 부서로 이동하였다고 했다. 하나는 이미 그렇게 논의를 마쳤던 거였지만 다른 하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 나 없이 잘해보시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 잘 됐네요. 그 부서가 그 업무를 더 잘할 수 있는 구조예요.”라며 나는 점잖을 떨었다(분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동료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이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뭐, 어쩌겠는가. 속상하고 자시고 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나는 육아휴직자고, 빨리 밥을 해 먹어야 기운 내서 마꼬를 씻기고 재울 수 있을 테니까.

오늘 메뉴는 내 마음대로 정했다. 계란이 두툼하게 들어간 시금치 프리타타에다가 치즈를 잔뜩 올려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리타타는 이탈리아식 계란찜으로 계란으로 해 먹었던 여러 요리들 중에 나름 간편하면서도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요리였다. 부드러운 계란과 고소하고 짭조름한 치즈, 토마토의 산미와 양파의 달콤함, 시금치의 깊고 풍부한 감칠맛이 어우러져 다채로우면서도 조화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이탈리아식 집밥이다.

집밥이니만큼 조리방법은 간단하다. 시금치를 포함한 (냉장고에 있는) 각종 채소들을 올리브유에 볶다가 계란물을 넣어 익히면 그만이다. 하지만 좀 더 맛을 내려면 치트키가 필요하다. 채소와 계란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지만 베이컨을 넣으면 환상이다.

우선 베이컨에서 기름이 나오는 걸 돕기 위해 팬에 올리브유를 아주 조금 두르고 베이컨을 채소보다 먼저 구웠다. 베이컨을 채소와 함께 볶으면 채소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 베이컨이 구워지는 게 아니라 익혀지기 때문에 베이컨을 먼저 조리했다. 베이컨이 바삭하게 구워지면 너무 타지 않도록 잠시 그릇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베이컨이 갖고 있는 염분이 기름에 남아있으므로 소금 간은 생략하고 양파를 중불에 볶았다. 양파에서 나오는 물기가 점점 사라지고 투명해지면 토마토와 시금치를 넣고 숨이 죽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살짝 볶았다. 이제 다시 베이컨이 등판할 차례다. 베이컨이 채소들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볶은 다음엔 미리 풀어둔 계란물을 팬에 부었다.

계란물이 들어가며 팬의 온도가 떨어지지만 계란은 금방 익게 되므로 이때부턴 타지 않게 불의 세기를 약불로 조절했다. 팬의 뚜껑을 덮고 계란 밑바닥이 노릇노릇 구워지면 이제 프리타타의 하이라이트, 뒤집기 차례다.

전이나 부침개처럼 집기를 쓰거나 던져서 뒤집는 게 아니다. 스페인 요리인 또띠야처럼 접시를 사용해야 둥그런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팬과 사이즈가 비슷한 접시로 팬을 뚜껑처럼 덮어 공중에서 과감하게 팬과 접시를 180도 돌리면 된다. 이때 조금이라도 우물쭈물하다가는 망친다. 뒤집기로 결정했으면 뒤 돌아보지 말고 오직 눈 앞의 것에 집중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크레디트 영상에는 영화의 실제 인물이자, 영화 전반에 자문 역할을 한 로이 최 셰프가 존 파브로 감독에게 치즈 그릴 샌드위치의 조리방법을 가르쳐주는 영상이 나온다. 특유의 집중하는 표정으로 불판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샌드위치를 바라보던 로이 최 셰프는 존 파브로 감독에게 샌드위치를 맛있게 만드는 특급 비법을 알려준다. 로이 최 셰프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아요. 이게 지금 세상에서 유일한 거예요. 이걸 망치면 세상을 망치는 거예요.”


왼손은 접시를, 오른손은 팬의 손잡이를 잡고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프리타타를 잘 뒤집어서 저녁을 맛있게 먹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자, 하나, 둘, 셋!




노오랗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프리타타 위에 치즈를 듬뿍 올려 식탁에 올렸다. 아내는 식사를 하며 오늘 마꼬에게 있었던 일을 신나게 얘기했다. 종종 마꼬의 흉내를 냈는데 엄마와 아들의 표정이 너무 똑같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우리를 마꼬는 바운서에 앉아 쪽쪽이를 빨면서 구경했다. 포카는 냄새를 맡으며 식탁 주변을 서성이다가 내 다리에 몸을 기대고 살며시 누웠다. 나는 프리타타를 먹으며 문득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답은 눈앞에 있었다. 나는 지금 이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깜박 잊고 계란물에 간을 안 한 적이 있었는데 뭔가 슴슴하더라고요. 다음부턴 잊지 않고 간을 하는데, 소금 대신 파마산 치즈 가루를 넣어도 괜찮더라고요. 혹시 모를 계란의 비린 맛을 잡기 위해 후추와 미림 1 작은 술도 넣고, 고소함을 배가시키기 위해 우유도 소량 넣으면 좀 더 맛있는 프리타타가 될 거예요.


-양면을 굽지 않고 안전하게 약불에서 뚜껑을 덮고 익히는 방법도 있어요. 익히면 맛이 보들보들하고요. 구우면 바삭해서 맛있어요. 취향에 맞게 해 보셔요!

이전 15화 좋아하는 술집에 갈 수 없어서 만든 요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