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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Sep 16. 2020

좋아하는 술집에 갈 수 없어서 만든 요리

고사리 파스타


아내는 출산만 끝나면 얼음을 잔뜩 넣은 레몬 하이볼을 마시겠다며 벼르고 별렀다. 산토니 위스키와 탄산, 레몬이 섞인 하이볼은 입 안에서 상큼하게 톡톡 쏘아대는 그 맛과 향이 일품이다. 아내는 기분 좋게 인상을 쓰며 하이볼을 들이켠 다음, 차가운 얼음을 와그작 씹어 먹고 싶어 했다. 내가 먹는 것도 아닌데 나는 상상만으로 즐거웠다. 입덧과 먹덧, 소화불량으로 고통받던 아내가 받아 들 차갑고 시원한 하이볼이 나도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출산 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아내에게 내가 아이를 재울 테니, 집 근처 술집에서 하이볼을 마시고 오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아내는 조금 주저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유수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는 레몬 하이볼은 아무 곳에서나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꼭 술집 ‘악어’에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술집 ‘악어’는 홍대에서 운영하다가 작년에 은평구 신사동으로 이사했다. 작년, 근처에서 공동 전시회를 했던 아내와 동료들은 ‘악어’에서 뒤풀이를 했다. 그곳에서 레몬 하이볼과 안주를 맛본 아내는 얼마 후에 나를 데리고 한번 더 ‘악어’에 방문했다. 아내 말대로였다. 술집 ‘악어’의 레몬 하이볼은 훌륭했다. 안주는 그 자체로도 훌륭했지만, 술과 함께하면 술을 더 맛있게 느끼도록 했다. 사장님의 음식 솜씨가 기가 막혔다. 안주 몇 가지는 비건 옵션이 가능했다. 가게 곳곳에 사장님 부부의 정성과 애정이 느껴졌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강과 같은 평온함이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홍대의 임대료로부턴 지켜주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지켜줘야 하는 가게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면 당분간 ‘악어’에 갈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코로나 19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내의 갈증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맥주나 소주는 눈에 차지 않는지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나는 산토리니 위스키를 사서 레몬 하이볼을 아내에게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다. 산토리니 유튜브 계정에 올라온 하이볼 만드는 방법을 참고하여 처음으로 술을 제조해 보았다. 아내는 고마워하며 내가 만든 하이볼을 마셨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마치 미술품의 아우라처럼 세상의 어느 갈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언제였던가. 코로나 19가 잠잠하던 때였다. 포카와 마꼬를 자동차에 태우고 외출했다가 술집 ‘악어’ 근처를 지나갔다. 아내는 ‘악어’가 코로나 19 때문에 손님이 없어서 영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근처이기도 하고 잠시 들리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나는 바로 운전대를 돌렸다. 오후 6시 즈음이어서 사장님 부부가 이제 막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손님이 많으면 포장을 하려고 했는데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반려견 출입 가능한 곳이라 포카도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 넷은 외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포카를 챙겼고, 아내는 마꼬를 안았다. 붉고 어두운 조명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마스크를 쓴 사장님 부부는 아내를 기억했다. 포카를 귀여워하며 물그릇을 갖다 주셨고, 반갑다며 마꼬에게 눈인사를 했다.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아내는 레몬 하이볼을 주문했다. 나는 운전을 해야 해서 사이다를 시켰다. 안주로는 고사리 파스타와 마라상궈를 부탁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마꼬를 데리고 가게 안을 구경했다. 가게의 한 빨간 벽면엔 아내와 동료들의 전시회 포스터가 여전히 걸려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뭉클하여 포스터를 배경으로 마꼬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주문한 음식과 레몬 하이볼이 나왔다. 평소 감정의 동요가 없는 편인 아내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감격에 겨워하며 단숨에 레몬 하이볼을 들이켰다. 그 차갑고 시원한 하이볼을 마시는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얼굴은 운동회나 마라톤, 벚꽃축제와 해수욕장처럼 이제 우리가 다시는 만나기 어렵게 된 것들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우리는 그 어느 곳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아내는 소원성취를 했지만, 이번엔 내가 상사병에 걸렸다. 그날 먹었던 고사리 파스타가 계속 눈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올리브유와 치즈가루가 아닌 들기름과 들깻가루로 만든 것 같았는데, 어찌 그리 맛있던지 계속 생각났다. 시장에 갔다가 튼튼하고 굵은 고사리를 발견한 나는 가격도 묻지 않고 냉큼 한 움큼을 사 왔다.

부엌에 서서 인터넷과 유튜브를 뒤져 보았다. 하지만 고사리 파스타에 대한 레시피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제사 지내듯 도마 위에 고사리를 두고 한참을 노려봤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시물레이션을 해본 다음, 조리 과정을 심플하게 알리오 올리오 하듯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이제 일사천리로 요리를 진행했다.




우선 냄비에 소금을 평소보다 덜 넣고 물을 끓였다. 소스를 간장으로 할 것이기 때문에 너무 짜지 않도록 소금 양을 주의해서 면을 삶았다. 팬에는 들기름을 둘러주었다. 마늘과 페퍼론치노를 다져 넣은 다음, 약불에서 볶았다. 마늘 색이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기다리진 않았다. 발연점이 낮은 들기름이 마늘보다 먼저 탈 것 같았다. 채 썰은 양파를 넣은 다음, 양파가 투명해지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고사리도 넣었다. 간장을 한 큰 술 넣어 맛을 한번 보고 적당하여 계속 볶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락없이 고사리 볶음이었다. 이젠 면수를 넣을 차례였다. 기름과 면수가 유화되도록 계속 저어 소스를 완성했다. 면에서 전분이 나오도록 소스에 면을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계속 돌려줬다. 마지막으로 파스타의 농도가 되직하게 되도록 치즈 가루 대신 들깨 가루를 듬뿍 뿌렸다. 면으로 시금치 페투치네를 사용했더니, 숲에서 피어난 고사리가 접시에 한 가득 담긴 듯했다.

‘악어’ 생각이 나서 나는 고사리 파스타에 맥주를 곁들였다. 고사리의 깊고 묵직한 맛이 마늘 향이 나는 들기름과 고소한 들깨가루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감칠맛을 낼 만한 고기나 해산물을 넣지 않았음에도 고사리가 싱싱해서 감칠맛이 살아있었다. 시금치나 아욱만큼 고사리는 채소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감칠맛을 품고 있었다. 맛뿐 아니라 고사리는 칼로리가 낮고 섬유질은 풍부하여 배변활동에 도움을 주고, 단백질과 칼슘, 인, 철분을 함유해 영양가도 많다고 알려져 있다. 고사리 파스타가 아니었으면 고사리가 이토록 훌륭한 식재료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물론 ‘악어’에서 먹었던 고사리 파스타만큼 맛있진 않았다. 그것은 레시피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만든 사람의 요리 솜씨 탓이기도 할 테지만, 미술품의 아우라처럼 그곳에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갈증 때문이기도 하다. 내 요리 솜씨가 아무리 좋아져도 ‘시간’과 ‘추억’이란 감칠맛은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햇빛이 한가로이 창문에 걸터앉은 오후, 아내가 SNS에서 화제 되고 있는 ‘운동회 아이들의 함성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듣지 않았지만 들은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순간, 그 시끄럽고 덥고 번잡스러운 소리가 허기지듯 서럽게 그리웠다.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것들, 어쩌면 영영 못 만날 것들을 떠올리니 고향을 잃은 것처럼 가슴이 시큰했다. 무엇보다 마꼬에게 미안했다. 이대로라면 마꼬는 운동회는커녕 문화센터를 경험하지 못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다. 마꼬에게 이런 세상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하루 종일 확진자 알림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가 쌓일 때면 나는 종종 ‘악어’를 떠올렸다. 언제쯤 ‘악어’에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임대료를 내지 못해 문을 닫는 집 근처 가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코로나 19로 일자리를 잃은 회사원들과 육아휴직 복귀 신청을 했는데 적당한 자리가 없어서 일을 그만둬야 했던 친구를 떠올렸다. 다들 얼마나 힘들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언제쯤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기에 육아휴직을 한 것은 잘한 것일까.


포카와 밤 산책을 하다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허위허위 그네에 몸을 맡겼다. 그네에 힘이 실릴수록 내 몸이 초승달처럼 초조하고 위태롭게 기울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려도 나는 그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차갑고 시원한 레몬 하이볼이 간절한 밤이었다. 물론 고사리 파스타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들기름은 올리브유와 참기름보다 발연점이 낮아요. 들기름을 센 불에서 가열하면 타면서 발암물질이 나오니 꼭 중약불로 조리을 하세요!


-저는 들깻가루로 되직하게 만들어서 먹었는데, ‘악어’에서 먹은 것은 되직한 느낌이 아니라 기름이 요리 전체에 코팅되어 소스가 자작한 느낌이었어요. 취향에 맞게 소스 농도를 맞추시는 게 좋겠어요. 물론 ‘악어’의 것이 훨씬 더 맛있어요. 포장도 되고요!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꼭 한번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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