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국과 홍어무침
작년 5월, 계획에 없던 사건이 생긴 걸 아내가 먼저 알게 되었다. 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했던 것이다. 아내는 외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 한 다발을 샀다. 손편지도 준비했다. 집에 돌아와 나를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어이없게도 나는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잠 묻은 얼굴로 꽃다발을 받게 된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토토, 아빠가 된 걸 축하해.’
비몽사몽 간이라 눈을 비벼보았지만, 그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아내가 상기된 얼굴로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잠결에 소식을 들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웃은 건 아내의 수줍은 고백이 예뻐서였다. 연애 시절 이후 오랜만에 본 수줍은 미소가 나를 설레게 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은 달랐다.
조금 무서웠다.
마꼬가 내 목소리에 응답하고 제법 눈을 마주치게 되면서 나는 종종 나의 어렸을 적 부모에 대해 생각했다. 마꼬의 기저귀를 갈아주다 말고, 마꼬에게 젖병을 물려주다 말고, 나를 향해 웃는 마꼬의 까만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기억 못 하는 내 어린 시절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 같았다. 나는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엄마와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때의 그대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대들은 어땠나요. 나를 낳고 어떤 심정이었나요?
어렸을 적 나는 온 동네가 다 아는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엄마가 아픈 후론 성격이 변했다. 내가 7살이었던 해를 시작으로 엄마는 15년 동안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앓았다. 지금이야 인식이 많이 변했지만 당시만 해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걸 쉬쉬할 때였다. 엄마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왜 아프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엄마가 창피했고, 엄마를 늘 그리워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면 집은 시들어버린 화초처럼 변했다. 아무리 할머니가 쓸고 닦아도 소용없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두 형제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3살 많은 형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고, 걱정되어서 울고, 영영 사라질까 봐 울었다. 엄마가 아픈 후로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 날 사라진 것처럼 죽는 게 아니라 엄마가 영영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손써볼 틈도 없이 무력하게 엄마를 빼앗길까 봐 무서웠다. 까만 밤마다 솜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고 눈물을 훔치며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나도 미쳐야지, 나도 미쳐서 복수해야지.
나는 할머니의 촌스럽고 투박한 밥이 싫어서 안 먹는다며 숟가락을 던졌다. 어린 나의 복수였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콩나물국을 특히 좋아했다. 쪼끄만 게 뭔 입맛이 그랬던지, 맑고 시원한 국물에 고춧가루를 팍팍 풀어서 밥을 한 공기 잔뜩 말아 후루룩 떠먹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국물에 고춧가루를 미리 풀고 마지막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넣었다. 나는 고춧가루가 풀어진 국물도, 입술이 번지르르해지는 것도 싫어서 서럽게 울었다. 울 일이 아닌데, 할머니에게 화를 낼 게 아닌데, 그때의 나는 그랬다. 엄마를 빼앗긴 어린 시절의 내가 할 수 있는 화풀이와 투정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만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빠져나가 파리해진 엄마를 부둥켜 앉고 나는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매달리는 것도 힘들어 내가 잠이 들면 엄마는 부엌으로 갔다.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두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애호박과 버섯을 듬뿍 넣은 된장찌개, 바락바락 치댄 아욱을 넣은 된장국, 감자와 돼지고기를 넣고 자박하게 끓인 고추장찌개, 멸치 다시마 육수에 파뿌리를 넣고 끓여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시원했던 콩나물국이 아직도 기억난다. 요리는 엄마가 아들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이자 최고의 사랑이었다.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고 엄마는 가끔 울었다. 그게 싫어 형은 화를 냈다. 소심한 나는 엄마의 음식을 먹고 나서야 엄마가 사라지지 않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는 걸 겨우 받아들였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밤마다 할머니가 부엌에 있는 칼을 숨겼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안 좋은 기사를 본 할머니는 모르는 일이라며 식칼을 신문지에 말아서 할머니 방 옷장에 숨겨두었다. 엄마가 된장찌개를 끓이고 나물 반찬을 할 때 사용하던 칼이 나도 무서워졌다. 낡은 스웨터들이 켜켜이 정돈된 옷장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식칼 이미지가 유년 시절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일들이 십 년 넘게 반복되니, 그 공포 속에서 살아온 나는 일상이 늘 불안했다. 약을 먹고 잘 견디던 엄마가 다시 증상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할 때면,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이 유리처럼 산산이 깨지는 듯했다. 갈 곳이 없었다. 엄마는 내게 디뎌야 할 땅이고, 돌아가야 할 고향인데, 내 발 밑엔 산산조각 난 유리들뿐이었다.
엄마가 왜 아프게 됐는지 엄마도 아버지도 알려주지 않아 나로선 알 길이 만무했다. 내가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구조적인 접근밖에 없었다. 큰 집의 며느리로 시집와 일 년 내내 명절과 제사를 치르고, 시골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꼬장꼬장했던 할머니를 모시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바쁜 아버지를 챙기고, 어린 두 아들을 키우느라, 엄마는 본인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엄마를 아프게 한 건 가부장적인 우리 가족이었던 게 아닐까. 가부장제는 며느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챙기라고만 할 뿐, 결코 본인을 챙기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아버지는 아픈 엄마를 돌보고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을 어린 나라고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한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는 ‘가장’ 역할은 잘했지만 ‘아버지’나 ‘남편’ 역할은 서툴렀다. 엄마가 아픈 동안 아버지는 나와 형을 할머니에게만 맡기고 회사 일을 하느라 밤늦게 돌아왔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불안에 떠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십 년이 넘도록 아픈 엄마를 보살폈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으로서 아내의 편을 들어주진 않았다. 같이 집안일을 하거나, 두 아들의 육아에 참여하거나, 본인의 엄마인 할머니 봉양을 직접 하지 않았다. 하물며 제사를 없애지도 않았다. 그때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면죄부로 작용할 순 없다. 엄마는 아픈 가운데서도 계속 제사를 지냈고 여전히 가족들 뒷바라지를 혼자 해야 했다.
엄마가 병에서 벗어났던 건 오로지 엄마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엄마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매일 명상하고 기도하고 절하며 자신을 수련했다. 목숨 걸고 단련하는 수행자의 절박함이 어린 내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그 고통에서 엄마를 구원한 건 엄마 자신이었다. 엄마가 더 이상 병이 재발하지 않은지 이제 15년이 지났다.
아마도 내가 여자였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혜택이 많은 남자인 나는 엄마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결혼했고, 아내에게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 아마도 아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면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혼 초, 나는 보고 배웠던 대로 무심코 아내에게 성역할을 부여하려고 했다. 제사를 지내러 가기 싫다는 아내를 설득하여 본가에 데려가기도 했다. 결혼했으니 막연히 아이를 낳자고도 했다. 다행히 아내는 어린애의 잠투정 같은 나의 치기와 몰상식을 가볍게 무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작업한 페미니즘 관련 일러스트를 내게 자주 보여줬다. 아내가 동료들과 함께 준비한 전시회에 다니고, 페미니즘 강연을 함께 듣고, 책을 읽으며, 결혼 후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엄마의 병과 가족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해석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앤써니 브라운의 동화책 <돼지책>처럼 우리 가족은 모두 돼지였다. 나라고 예외이지 않다. 나 역시 엄마에게 돼지였다. 그런 나를 구원한 건 전적으로 아내 덕택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스스로를 구원한 엄마 덕분이다.
하지만 나의 구원은 내가 간절히 염원하여 목숨 바쳐 얻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투명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보인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나 역시 아이에게 결국엔 상처를 주지 않을까. 기뻤지만, 무서웠던 것이다.
영상통화로 보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마꼬는 울음을 터뜨렸다. 온 집안을 소독하고 거실에 두툼한 이불을 깔고 마꼬와 놀아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엄마와 아버지는 기대와 달리 마꼬가 울자 머쓱해했다. 코로나 19 때문에 두 달간 집에서만 아이를 키우던 우리 부부는 마꼬의 사회성이 걱정돼 슬슬 본가와 처가를 방문했다. 아내가 마꼬를 달래서 다시 엄마 품에 안겼다.
"어때요?"
"내 손주지만 너무 예쁘다."
엄마의 말과 달리 마꼬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확실히 예쁜 표정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마꼬는 배냇 웃음 외엔 별로 웃지 않았다. 마꼬가 너무 안 웃는다며 아내가 걱정하자, 엄마는 나도 어렸을 때 꼭 그랬다며 책장에 올려둔 사진첩을 가리켰다. 사진 속 백일도 안 된 나는 마꼬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에 적응하자 누구보다 잘 웃었다면서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너도 예뻤어. 마꼬처럼 예뻤어."
엄마가 눈을 맞추자 마꼬도 엄마를 바라봤다. 끝까지 웃진 않았지만 마꼬도 엄마 품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서서히 미간이 펴졌다. 그게 우스운지 엄마는 시종일관 웃었다. 곁에서 아버지도 따라 웃으며 조심스레 아이의 발가락을 만져보았다.
"애 키우느라 힘들지?”
“응. 진짜 힘들어.”
“육아가 원래 그래. 엄마도 힘들었어. 그래도 너네 키우는 게 엄마는 제일 재밌었어."
마꼬가 하는 모든 몸짓과 표정에 엄마와 아버지는 의미를 부여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넋을 놓고 한참 그들을 바라봤다. 어린 나를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걸까. 과거의 젊은 부부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리고 여렸다. 나는 그들이 앞으로 겪을 일들이 안쓰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는 부엌에 들어가 다 같이 먹을 음식을 조리했다. 나도 형도 엄마를 도와 식탁을 함께 차렸다. 산후조리에 좋다는 홍어로 만든 새콤달콤한 홍어무침도 식탁에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니, 엄마가 그때 사라지지 않고 이 집에 계속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그날 나는 밥을 두 공기 먹었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떠날 채비를 했다. 엄마는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우리와 함께 주차장까지 따라 나왔다. 떠나려는 우리에게 엄마는 말했다.
"고맙다."
엄마는 뭐가 고마운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게 나를 낳고 어땠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것 같았다. 그 말엔 지난 세월이 전부 담겨 있었다. 나보다 어리고 여렸던 여자는 이제 흰머리가 성성했다. 나를 키우고 자신을 다스리며 보낸 세월이 새하얗게 머리에 내려앉았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고마워요."
원래 육아는 힘든 거라지만, 지옥이 되어선 안 된다. 어느 한 명의 희생으로 지탱하는 관계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엄마가 병이 난 것처럼 언젠가 탈이 나고 만다. 내가 무서웠던 건 아내의 산후 우울증이었다. 나는 그것만은 피하고자 했다. 마꼬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부는 오랜 시간 의견을 주고받았다. 나와 아내는 최대한 즐겁게 육아를 시작하고 싶었다. 출산과 동시에 육아휴직을 하고 부부가 공동육아를 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나는 내 감정에 조금씩 솔직해지기로 했다. 드라마의 여느 부부들처럼 환희에 차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런 과거를 겪은 내가 기뻐 날뛰는 게 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도 나 스스로에겐 괜찮다고 계속 말해주었다. 자기 새끼를 지키려고 털을 바짝 세우며 소리 지르는 길거리의 고양이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내 새끼를 지켜낼 수 있을지, 나처럼 상처를 겪진 않을지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것도 어쩌면 부모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 않을까. 부모도 약하니까. 그럼에도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고 싶으니까.
다행인 건 마꼬가 태어난 후, ‘잘 키울 수 있을까.’ ‘나 역시 아이에게 결국엔 상처를 주지 않을까.’ 그런 질문 따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깨달은 게 아니라 이젠 그 질문을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어떻게 이 아이를 키울 것인지, 어떻게 하면 더 사랑을 줄 수 있을지, 그것만 고민한다. 다른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이제 나는 무섭지 않다.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생선 중 유일하게 삭혀먹는 홍어는 산후조리에 좋다고 알려져 있어요. 미역처럼 알칼리성 식품이라 산성체질을 알칼리성 체질로 변하게 해서 골다공증 예방과 산후조리, 병후회복에 효과가 좋다고 해요. 또한 관절염 치료제로 쓰이는 황산콘드로이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칼슘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예방해준다고 하니, 칼슘이 많이 필요한 산모에게 큰 도움을 주겠어요.
-콩나물국에 파뿌리를 넣으면 국물이 시원해져요. 콩나물국밥이 콩나물 국보다 시원한 이유가 파뿌리 때문이라고 해요. 감기 기운이 있어서 으슬으슬할 때, 파뿌리를 넣고 한번 끓여보세요. 고춧가루도 팍팍 넣고 드셔 보세요. 환절기 감기 모두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