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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Sep 12. 2019

추석 때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명절

추석은 명절이다. 영어로 하면 holiday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추석은 이름만 들어도 신이 나야 하고, 명절이라니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마땅한 날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며느리들일테고, 그리고 결혼 못(?)한 싱글들, 취직 못(!)한 백수들에게도 누구 부럽지 않게 반갑지 않은 날이다. 명절이 좋았던 시절은 아주 어릴 때뿐이다. 해주는 거 먹고, 뒹굴거리며 티브이 보면 되는 팔자 좋은 어린 시절 말이다. 명절에는 온 가족이 모이고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왜 스트레스가 될까? 사실 이 이야기는 입 아프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추석 때 뭐 하고 싶어?


지난주에 남편에게 추석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의 주요 명절이라고. 그랬더니 뭐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송편 하고, 갈비 하고, 토란국 하고..." 음식 이야기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거 하고 싶은 거 맞아? 지금까지 해 왔던 거 말고, 하고 싶은 거...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꽤 어릴 때부터 추석 때는 일을 해야 했다. 우리 집은 종갓집도 아니었고, 큰아버지댁은 너무나 멀었다. 당시에 서울-부산이면 온 식구 이동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대학교수이셨기 때문에 명절에는 의례 제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아주 어릴 때에는 그들이 사 오는 과자 박스 같은 것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커가면서 엄마의 부엌일을 돕는 역할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명절이라고 영화도 보러 가고 모여서 놀기도 했지만, 나는 어머니 혼자 일 하시라 할 수 없어서 늘 부엌에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긴 내가 아무리 해봐야 어머니만 했겠는가.


그리고 결혼 후에는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비슷한 며느리 생활이었다. 시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시댁 가는 것이 추석 때 하는 일이었고, 그 이후에는 집에서 상을 차렸다. 아이까지 유학을 나간 이후에는 정말 먹는 사람도 없다고 많이 간소화하였으나 그래도 차례는 지내야 하므로 역시 추석은 음식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외에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내가 딱 말문이 막히자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엇이든 좋으니까 당신 하고 싶은 거 하자고. 물론 송편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서 먹으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음식을 하면 그가 옆에서 모든 것을 다 같이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송편에 대한 추억도, 토란국에 대한 특별함도 없다. 그냥 어느 한식 요리 중 하나일 뿐이다. 옆에 딸이라도 있다면, 아이가 좋아하는 송편을 한다고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까 역정을 내면서, 자기가 추측하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모른다. 한국 여자들에게 있어서 명절에 아무것도 안 하기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 수가 없겠지. 


"영화나 볼까?" 내가 말을 꺼냈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영 중인 영화가 뭔지도 사실 몰랐다. 그냥 막연히 꺼낸 말이었다. 어릴 때, 나도 친구들처럼 추석에 영화 보러 가고 싶었던 아쉬움 때문이었나 보다. 함께 영화를 검색하는데 딱히 꽂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영주권 곧 나온다고 했는데...


우리 국경 넘어 놀러 갈까?



우리 집에서 미국 넘는 국경까지는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다. 다만 내 신분으로는 출국이 불가능한 상황일 뿐. "만일 주중에 영주권이 나온다면 기념 삼아 국경 한번 넘어갔다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일치기로 가볍게 가서 한 바퀴 돌고 장 봐서 올라오자고 했더니, 기왕 간 거 하룻밤 자고 편히 놀다 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날짜가 촉박해서 숙소는 다 비싸네. 뭐 사실 그때까지 영주권이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은 금물이겠지.





여기까지 쓰고 있었는데 우편물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달려 내려갔다. 오! 왔다! 영주권이 왔네! 국경 넘기 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갈지 안 갈지는 모르지만, 선택할 자유가 생겨서 기쁘다. 그리고 기다리다가 너무 기진맥진하기 전에 나와서 기쁘다. 



아마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 여행기록에 첫 줄을 장식하게 되겠지. 추석 기념이든 영주권 받은 기념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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