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픽사에서 점심 먹어보기?
샌프란시스코를 간 이유가, 딸아이를 만나러 간 것이니, 딸아이가 일하는 곳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확히는 샌프란시스코가 아니고, 다리 건너편에 있는 에머리빌이라는 도시이다.
작은 도시이다 보니, 그 지역에서 픽사는 중요한 회사 중 하나일 것이다. 딸아이와 식료품을 사러 갔는데, 계산대 직원이 아이를 보며 반갑게 물었다.
"픽사에서 일하나 봐요."
"네? 아, 네."
"무슨 일 해요?"
"애니메이션 파트에서 일해요."
"와! 진짜요? 멋지다!"
딸은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자기가 픽사 모자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 직원의 반응은 뜨거웠다. 내 처음 생각으로는, 그럼 픽사에서 뭘 할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묻는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모든 회사가 그렇듯이, 그곳에서도 애니메이션 이외에 회사 자체를 굴리기 위한 여러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딸은 나의 도착과 더불어 픽사 방문 일정을 먼저 의논해 왔다. 픽사는 일반인 방문이 일부 허용되는 회사이다. 복지가 잘 되어있는 회사이다 보니, 직원의 지인들이 방문하여 구경하는 것을 허용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것 같다. 이 기회에 회사 홍보도 할 수 있으니 그들로서도 나쁘지 않은 방식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방문할 수는 없다. 회사 방문을 하기 위해서는 신상정보를 등록하고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물론 딸아이가 예약을 해놓았고, 우리는 회사 입구에서 신분증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자 경비실 직원은 우리에게 픽사 입장용 이름표 스티커를 건네주었다. (스티커 사진 찍는 것은 금지되어있다고 해서 사진을 올렸다가 지웠다)
방문객용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고, 스티브 잡스 빌딩으로 들어가면 딸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도 함께 전달되었다. 그는 동시에 딸에게 문자를 넣어 우리의 도착을 알렸을 것이다. 스티브잡스 건물이라니 이름도 참으로 쿨하네!
잘 정리된 잔디밭사잇길로 들어가니 저쪽에서 딸이 손짓을 하며 우리를 맞이했다. 아침에 집에서 봤는데도 어쩐지 새롭게 반가웠다. 이 회사 안에서 우리는 반드시 딸과 함께 다녀야 한다. 방문자끼리만 돌아다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딸이 예약한 시간은 자신의 점심시간을 끼고 11:15 ~ 2:00였다.
점심시간이 그렇게 기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딱 정해진 점심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당이 문을 여는 시간이 점심시간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일을 하고, 미팅에 참여한다면 나머지 시간은 알아서 관리하면 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딸아이는 오후 2시 미팅 시간에만 참석을 하면 괜찮다고 하였다.
스티브잡스 건물 앞에는 큼직한 사이즈의 픽사 공과 스탠드 전등(Luxo Jr.) 장식이 놓여있었다. 픽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설치하여 놓았기에 우리는 픽사 공간에 들어왔음을 바로 실감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방명록에 사인을 하며 보니, 주변에도 픽사 캐릭터의 인물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로비 안쪽으로는 회사 식당이 바로 펼쳐져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지하 공간의 구내식당이 아니라, 누구나 지나다니는 로비에 식당이 오픈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딸은 원래 매식을 안 하는 성격인데, 회사 음식이 언제나 아주 맛있어서 도시락을 싸지 않고 그냥 점심을 사 먹는다고 칭찬을 했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식대의 반을 회사에서 부담하기 때문에 좋은 품질의 식사가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구내식당은, 음식을 잔뜩 해놓고 오는 사람들에게 적당량을 퍼주는 이미지였는데, 이곳에서는 주문을 받은 후에 그 음식을 바로 조리해서 접시에 담아주었다. 즉,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일반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의 음식이었다.
메뉴는 때에 따라 바뀌고, 또 일주일별로 테마를 잡아 특별식을 넣기도 한다. 우리가 방문하던 그전 주는 한국음식 주간이었다고 했다. 특별한 한식은 아니었지만 그런 테마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그걸 먹으니 속이 편안했다고 딸이 말했다. 그들은 굉장히 고심해서 메뉴를 정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한다고 했다.
피자를 굽는 화덕 앞에서는 요리사가 심지어 피자 반죽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피자보다는 좀 더 빠르게 준비되는 음식으로 주문을 하였다. 나는 꼬치에 꽂힌 새우와 브로콜리를 골랐고, 남편과 딸은 닭고기 메뉴를 골랐다. 그리고, 디저트도 초콜릿 뽀드 크렘(chocolate pot de crème)으로 하나 집어 들었다.
로비 안쪽에도 자리가 많았지만, 우리는 화창한 날씨를 즐기러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먹는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구운 새우 꼬치에서는 불맛이 났고, 초콜릿 디저트도 아주 훌륭했다. 들어가서 레시피를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디저트들이 미슐랭 별 받은 요리사가 만드는 거라는 후문을 들음!)
식당에는 식사 이외에도 커피나 음료, 차 등이 제공되는데, 일회용 컵이나 사기로 된 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딸은 늘 사기 컵을 이용하는데, 누군가가 왜 그걸로 먹느냐고 물어봤단다. 딸의 대답은, "맛있어서." 였다고 했다. 환경을 위해서 그런다고 대답하면 약간 꼰대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종이컵에 든 음료는 맛이 없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우리가 식사를 일찍 시작한 덕에 남들이 여전히 음식을 받겠다고 줄을 서있는 시간에 우리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투어의 시작은 역시 쇼핑 아니겠는가!
로비에는 작은 기념품 샵이 있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외부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픽사만의 기념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도 뭔가 기념이 될만한 것을 갖고 싶었다. 결국 남편을 위해 모자를 선택하고, 나를 위해 티셔츠를 하나 샀다. 그냥 나오려니 섭섭해서 엘레멘탈의 그림이 있는 카드를 사고, 배지도 샀다. 영화에서 물소년이 불소녀를 물방울 안에 넣어 데려가던 장면을 생각하며, 남편은 물소년, 나는 불소녀의 배지를 선택했다.
딸아이는, 우리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여행 와있는 영국언니 소피의 아들을 위해서 꼬마 픽사볼을 하나 사서 건넸다.
그곳을 나와서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부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볼만한 곳은 바로 여기였는데 말이다!
금지된 이유는, 직원들의 사무실이기 때문에 기밀이 새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개별적인 공간을 존중하는 데에 그 의미를 두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여러 명이 한 팀이 되어 꾸리는 사무실들이다 보니, 각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컨셉으로 꾸며서 방안이 상당히 화려해 보였다. 다들 예술인이다 보니 방안의 컨셉이 아주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사진은커녕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남의 사무실은 기웃거리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딸의 조언 덕분에 무례함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바닥이 나무마루인 곳은 가도 되는 곳이고, 카펫이 깔린 곳은 제한구역이라는 딸의 말에 따라 2층을 전체적으로 구경했다. 2층 복도는 엘레멘탈 컨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했던 여러 가지 스케치들이나 기획안들이 전시장처럼 벽에 걸려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돌아다니면서 딸의 동료들도 가끔 마주쳤는데, 웃으며 슬쩍 손짓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이도 있었고, 와서 우리에게까지 직접 인사를 하는 붙임성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와중에 피트 닥터(Pete Docter) 감독과 세 번이나 마주쳤는데, 한 번은 딸아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고, 한 번은 손까지 흔들어줬다. 놀란 것은 우리 딸이었다. 그가 지나간 이후에, "나를 알아?"라는 혼잣말을 외치기까지 했다. 물론 만난 적은 있지만, 저렇게 바쁜 사람이 자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딸아이. 그는 정말 우리 아이를 기억했던 것일까? (기억하고 있었다고 나중에 판명이 났다!)
스티브 잡스 건물에서 나와서 옆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잘 관리된 잔디밭이 있었고, 사진엔 없지만 안쪽으로 수영장도 보였다.
옆 건물도 사무실들이 있는 곳이었고, 역시 픽사의 캐릭터들이 곳곳에서 우리를 반겨줬다. 우리는 그냥 휘리릭 한 바퀴 돌고 나왔는데, 그 안에 포켓볼 당구대가 놓여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직원들이 식사 후 즐겁게 포켓볼을 치고 있었기에 사진은 찍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대략 2시간가량을 픽사에서 보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왔다. 소감이라면, 이런 곳에서는 정말 일할 맛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픽사를 방문했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분위기와, 직원들의 밝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깨끗하게 관리된 정원과 평화로운 느낌도 좋았다.
특히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회사이다 보니 직원들의 복지를 더욱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딸의 말에 의하면, 직원을 굉장히 착취하는 제법 유명한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있다고 했다. 딸이 언급한 회사들의 이름은 적지 않을 것이다.
독립회사로 시작했던 픽사는 현재 디즈니 계열사가 된 상태이다. 그전에는 2년에 한 번 정도의 작품을 제작하며 보다 독보적인 작품 추구를 했었는데, 지금은 일 년에 한편, 심지어 일 년에 두 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상황이라고 했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영화가 나오는 것도 좋지만, 픽사만의 개성이 듬뿍 들어있는 보다 감수성 깊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기다리는 마음도 크다. 앞으로 픽사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모쪼록 멋진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들어 팬들을 웃고 울려줬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