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이 아니라 현실인 생활
길고 길었던 밴쿠버의 우기가 끝나고 드디어 보송보송한 여름이 왔다. 한국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밴쿠버의 여름은 축축하지 않다. 건조해서 산불이 나는 그런 날씨다.
올해는 유난히 우기가 길어서 7월이 넘어서야 해가 나기 시작했고 갑자기 뜨거워졌다. 나는 그동안 움츠렸던 몸을 좀 움직여서 혈액순환을 시키고 싶었다. 물론 마당에 일거리가 널렸고, 영어 수업도 방학에 들어갔으니 몸은 원 없이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런 거 말고 좀 빠른 움직임을 해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아침 산책.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나가서 동네를 속보로 가볍게 돌고 오는 것을 선택했다. 운동과는 담쌓은 체질이다 보니 이 정도만 해도 꽤나 활력을 주었고, 덕분에 동네의 예쁜 꽃길을 구경하는 기쁨도 얻었다.
서양의 주택들은 집 앞을 꾸미는 것에 아주 신경을 쓰는 편이다. 남들이 자기 집 앞을 지나가면서 즐겁게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굳이 마당을 가꾸지 않더라도, 봄이 오면 다들 꽃바구니 화분을 만들어서 현관 앞에 걸어 놓는다. 색색의 꽃들이
처음에는 이게 참 신기했다. 그래봐야 이 화분들은 한철일 뿐이고, 겨울이 되면 전부 죽어 없어지는 일년생 꽃들인데, 이렇게 돈을 들여서 매년 화분을 사서 건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역시 관점은 사람들마다 다른 것이리라.
내가 가드닝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이 꽃바구니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냥 예뻐서 좋다. 이것저것 다르게 해서 걸어 놓으면 집 앞에 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리고 겨울에도 온실에서 잘 관리하면 해를 넘겨서 다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 좋았다.
지금은 더 이상 걸 곳이 없어서 주체를 못 할 만큼 많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이 바구니에 올해는 무슨 꽃을 넣을까 고민하며, 작은 모종을 여러 개 사서 직접 꾸미기도 하고, 정말 저렴한 가격에 풍성한 것이 나오면 또 덥석 사게 되다 보니 집 앞뒤로 아주 넘쳐나서 문제일 지경이다.
아무튼 그래서 산책길 돌아다니면서 집구경 하는 게 아주 재미나다. 다리는 부지런히 걷고, 눈은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간다. 기분은 흥얼흥얼 좋고...
둘러보다 보면, "아, 나도 저 꽃 심고 싶다, "라든가, "이 화초를 이렇게 두니 예쁘네!" 같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모퉁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퉁이다. 대플드 윌로우(dappled willow)라는 삼색 버드나무인데, 가격도 제법 비싼 이것으로 집 울타리를 두르다니 인심이 아주 넉넉하다 싶다. 자기네 집안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위치인데, 이렇게 정성껏 꾸며 놓아서 지나가는 발걸음이 아주 즐겁다.
삼색 버드나무라는 이름이 어울리게, 흰색과 분홍색, 녹색이 어우러져 늘 꽃이 핀 듯 보인다.
그날도 이렇게 구경하면서 흐뭇하게 모퉁이를 돌았는데! 앗! 저 건너편에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처음에는 큰 개인가 했는데!
덩치가 제법 되는 곰이었다.
위 사진은 현장에서 찍은 것은 물론 아니다. 저 상황이 되면 저런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른 아침이었고,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곰과 거리가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어슬렁거리고 오는 중이었지만, 한 5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슬슬 뒷걸음질 쳐서 다시 모퉁이로 되돌아갔다. 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다음에는 정신없이 달렸다.
물론 다행히 그 곰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다른 집들의 쓰레기통에 더 관심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뭔가 몰두해서 샛길로 빠지지 않는 한, 그저 어슬렁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당연히 내 걸음보다 빠르다. 즉, 나 역시 어슬렁 거리며 걸으면 곧 따라 잡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달려본 것이 얼마만인지! 만점도 못 받은 고등학교 체력장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곰과 마주치면 무섭냐고? 맨날 집에 곰이 온다면서 왜?
물론, 우리 집 마당에 수시로 곰이 찾아오고, 우리 호박도 따먹고 하지만, 집에서는 나의 영역 안이기 때문이 이렇게 당황스럽지 않았다. 실제로 바로 4미터 앞에서 정면으로 곰과 마주친 적도 있었지만, 나는 후다닥 달려서 데크로 올라와 여유 있게 사진을 찍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때는 나 혼자였고, 어디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급하면 누군가의 집을 두드려서 도와 달라고 할 수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며칠간 산책을 못 나갔다. 근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니 또 슬슬 나가고 싶어 진다. 곰아, 숲 속으로만 다니면 안 되겠니?
유튜브에서는 산책길의 동영상을 좀 더 보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