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5박 6일 99홀 골프 여행
"어머 전지훈련 다녀오셨다면서요?"
"일본 전지훈련 다녀오더니 골프실력이 진짜 많이 늘었네!"
"나도 전지훈련 갔다 와야겠다."
오랜만에 골프 라운딩에서 만난 지인들에게 들은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다녀온 것은 전지훈련이 아니라 극기훈련이었다. 극기 훈련인 이유는 앞으로 펼쳐질 장황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극기훈련'의 사전적 정의는 '스스로를 이긴다'는 의미로,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훈련이다. 마지막으로 극기훈련을 떠났던 때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략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때 갔던 캠프 중 하나였지 않을까 싶다.
마흔 살에 극기훈련을 떠나게 된 이유는 친정 부모님, 정확히 표현하자면 친정 엄마 때문이다. 30년째 골프에 진심인 친정엄마가 50대에서 60대로, 60대에서 70대에 들어서시면서 원래 다니던 골프 동호회 참여가 어려워지시고, 다니던 모임도 와해되는 입장에서 찾은 돌파구는 해외 골프여행이었다. 해외골프 여행은 해외여행도 가기 때문에 한국의 골치 아픈 문제점들은 잠시 뒤로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에다가, 좋아하는 골프를 쾌적한 환경에서 마음껏 칠 수 있다는 혜택이 있다. 무엇보다 골프를 많이 치니 한국에서 한 홀당 골프를 치는 것에 비해서 상당히 저렴하다는 매력으로 가성비를 중시하는 엄마에게 아주 매력덩어리 그 자체였다.
친정 엄마가 해외골프여행을 다니신 지만도 사실 20년이 다되셨는데, 그동안 밴드를 통해서 해외골프동호인들을 위한 여행상품을 만드는 골프 여행 전문 여행사의 사장님과 가까워지셨다. 20년째 단골이라니 맛집 단골도 아니고 찐 VIP 고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이번 여름에도 일본 북해도 골프여행을 계획하고 계쎴는데, 자주 가던 엄마의 친한 동생부부 중에 남편분의 참석이 어려워지시자 한 명을 더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4인이 함께 플레이하는 골프의 특성상 3인이 플레이하는 것보다 한 명을 더 해서 4명이 플레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더 합리적인 상황이었다.
1명을 더 모집하기 위해서 주변에 눈을 돌리셨지만, 막상 갈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없었다. 주변인에서 딸들, 사위로 시선을 좁혀 나와 언니 중에 한 사람이 가기로 정해졌고, 휴가를 내기가 좀 더 용이한 남편을 둔 내가 가족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렇게 5박 6일간 99홀의 골프를 치는 극기훈련이 계획되었다.
초등학생 두 딸을 둔 엄마인 내가 5박 6일의 휴가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함께 사는 남편의 배려로, 그것도 친정부모님과 함께하는 골프여행이란, 8월 15일 연휴를 포함한 일정이라 회사에 며칠간만 휴가를 내면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기에, 가볍고 무거운 마음으로 합류를 결정했다. 막상 출발 며칠 전까지 마음에 큰 부담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여권사본만 보내면 모든 일정은 여행사에서 알아서 해주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미리 예약해 놓고 마음속 한편에 잊고 있었다.
아침 비행기라 출발 당일에는 친정으로 가서 콜벤택시를 타고 함께 골프백을 싣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이미 여러 번 같은 콜벤 택시를 이용한 친정부모님은 모든 과정이 익숙해 보이셨는데, 70대 친정부모님과 60대 엄마의 친한 동생분과 함께하는 골프여행의 시작을 맞이하자 이번 여행은 쉽지 않겠구나 하고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북해도 공항에 도착해서 준비된 전세버스에 타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카트에 커다란 골프백과 여행가방을 싣고 옮기는 일도 어려웠지만 여러 전세버스 가운데 우리의 버스가 도착하지 않아 다른 버스에 탔다가 다시 내리기도 했다. 2시간여 달려 도착한 리조트에서는 짐도 푸를 시간 없이 당장 오후에 준비된 9홀 라운딩을 준비해야 했다.
9+27+18+27+18 = 99
5박 6일 99홀을 치는 일정 중에서, 첫날에는 18홀로 이루어진 골프플레이 중에서 첫날 9홀을 칠 수 있게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문제는 공항에서 허비한 시간이 늘어나면서 9홀을 다치기도 전에 해가 지면 도중에 플레이를 마감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5박 6일에 숙박과 항공권, 라운딩, 조식과 석식이 포함된 여행 상품의 금액은 개별적으로 지급하거나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라운딩을 가는 금액보다 훨씬 더 저렴했는데, 모든 저렴한 상품에 독이 있듯이 이 상품 또한 그랬다.
일본 골프장 특성상 캐디 없이 진행되는 골프 라운딩이었고, 4인이 난생처음 가보는 골프장에 카트를 직접 운전해서 다니고, 골프장비를 직접 손에 들고, 내가 친 공이 물로 가는지, 산으로 가는지, 제대로 갔는지 잘 봐야만 했고, 마지막에 캐디 이모가 다 놔주던 데로만 치던 퍼팅 또한 직접 판단하고 놓고 넣어야만 했고, 골프점수 또한 직접 작성해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것을 수행하기에 같이 가신 부모님의 나이가 연로해서, 내가 주도적으로 해야만 했는데, 갓초보를 벗어난 나의 골프 실력으로는 이 모든 일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비싼 캐디피를 내고 캐디님을 고용했던 이유가 납득이 갔다.
골프여행의 첫날 9홀의 라운딩은 지는 해와의 싸움이었다. 이번 투어에 함께한 팀은 6팀정도 됐는데 6팀이 줄줄이 기다려서 출발하는 라운딩에서는 먼저 출발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 타라도 더치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6팀 중에 2번째로 출발한 우리 카트는 해가 지기 전에 한 타라도 더 치기 위해서 100m 달리기 하듯이 라운딩을 끝내고 넘어갔다.
결국 9홀 중에 5홀쯤 마쳤을 때 골프장에서 알려준 정해진 마감시간 오후 6시 30분이 넘어가 라운딩을 마쳐야 했는데, 이때부터 부모님의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규정대로 정해진 시간에 끝내야 한다는 아빠와 앞에 다른 팀도 플레이하는 거 같은데 조금 더 쳐도 된다는 엄마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 여행을 아니 극기훈련을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앞날이 캄캄했다. 골프훈련을 온 건지 정신수양을 하러 온 건지 미궁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