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경X인영구] 댕경으로부터
과외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종량제 쓰레기봉투가 다 떨어졌다는 게 생각이 나서 집 앞 편의점에 들렀어. 아무 생각 없이 편의점 음료들을 지나치다가 양주가 눈에 보이길래 제일 싼 거 한 병을 집어서 쓰레기 봉투랑 같이 샀어. 요즘엔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쓰고 있어서 블로그에 글 포스팅을 마치고, 잘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까 사온 양주가 생각나더라고. 제일 큰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서 양주를 1/3쯤 붓고 탄산수를 가득 부어서 홀짝홀짝 마시고 리필하고 마시고 했더니 한 병을 다 마셔버린거야. 그러고 나서 문득 달력을 보니까 오늘이 만우절인거야. 만우절이 특별한 날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뭔가 적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 술주정을 핑계로 옛날 얘기를 적을까 생각했었는데 만우절이니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인영이라면 왠지 이렇게 시답잖은 글도 다 좋게 봐주고 웃어넘겨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만우절이라는 단어를 정말 오랜만에 떠올려서 그런지 옛날 기억들이 새록새록 나더라고. 나 스무살 만우절 되던 날 새벽에, 좋아하던 여자애한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어디서 들은 건데 만우절날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Top3 중에 하나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거래.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못 하는 사람이어서 그 날 만우절을 핑계삼아서 좋아한다고 말했어. 웃기지. 되게 한심하지. 그 친구랑 학기 초부터 금방 친해졌었는데, 만우절이라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주면 좋았을텐데, 결국 그 친구랑은 멀어지고 말았어. 그 날 이후로 든 생각이 뭐였나면, ‘아 나는 절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함부로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되겠다.’ 였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그 사람을 오래 보고 싶다는 내 욕심에서 나온 결론이었어. 이것도 웃기지. 되게 한심하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도 나는 학교생활 열심히 놀러다니고 술마시러 다넜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동기들이랑 자연스럽게 친해졌어. 지금은 그 때보단 나이 몇 살 먹어서 그런가 술 마시면 금방 취하고 졸리고 머리아프고 그런데, 그 땐 젊어서인지 아무리 마셔도 도무지 취하거나 필름이 끊기질 않아서 동기들끼리 술 마시다 애들 취하면 맨날 내가 애들 집 보내주고 다 챙겨주고 제일 마지막에 들어가고 그랬거든? 근데 술도 지지리도 못 마시는 애가 자기 집 가깝다면서 맨날 퍼마셔가지고 내가 술자리 끝나고 맨날 업어다줬단말이야. 자꾸 업어다줘서인지 마음이 가더라고 그 친구한테. 나 그 때부터 그 친구를 1년 넘게 짝사랑했거든. 근데 그 만우절 때 생각이 자꾸 나는거야. 나 또 이 친구랑 멀어지겠다. 그래서 맘에도 없었는데 일부러 그 친구한테 안 좋은 말 하고 나쁜 말 하고 그랬거든. 그 때 그 친구가 울면서 자기가 잘못한 거 있냐고 그랬었는데 그게 너무 미안하더라. 그렇게 내가 좋아하던 친구한테 막 나쁜 말 하면서 밀어내려고 하다 보니까 그 친구랑은 약간 서먹해진 사이가 되어버렸단 말야. 그러다 나 군 입대가 얼마 안남았을 때, 같이 술마시고 공부하러 다니던 친구들이랑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진실게임을 하재. 그래서 막 서로 이야기 하다가 마지막 질문이 ‘그래서 여기 있는 이성한테 마음 있었던 적 있냐?’ 였거든. 진실게임이니까 난 1년 넘게 짝사랑했던 그 애한태 있었다고 했다? 그 친구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소리 듣고 또 울더라고. 아니 왜 울지? 진짜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그래서 그 때 이후로 나는 절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티를 내지 말아야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티내지 말아야지. 이런 마음의 벽 같은 게 생긴 것 같아. 이후로도 짝사랑했던 사람이 한두 명쯤 있었지만, 절대 얘기하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 먹었어. 되게 웃기지. 바보같지. 근데 마침 오늘이 만우절이네. 그래서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만우절이라서, 옛날 생각이 자꾸만 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오래 보는 게 맞겠지 싶어서, 그냥, 그랬어. 갑자기 생각나서 적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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