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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Sep 29. 2020

얼마나 더 간절해야 할까요

이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고 있는 걸까.

기도를 검색하면 이런 뜻이 나온다.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빎.




한쪽의 기도가 강해질수록 다른 한쪽의 기도는 짓밟혔다. 기도도 기도끼리 싸움을 했다. 어떤 기도가 욕망대로 이길수록 어떤 기도는 무참히 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임솔아 작가의 소설 <최선의 삶>에 나오는 구절이다. 층간소음을 피해 무작정 밖으로 나갔던 날이었다. 걷고, 걷고, 걷다가 서점에 들어가 우연히 이 문장을 만났다. 이 부근을 읽으며 믿음에 대해, 기도에 대해, 종교에 대해, 위층에 대해 평소보다 더 많이 파고들었다.




위층 대문에는 00교회 표시가 붙어있다. 계단에는 자전가 두 대가 계단 난간을 따라 매달려있다.


관리사무소에서 해주셨던 조언대로 피해자인 우리 집이 소통을 위해 과자를 사 들고 갔을 때와 위층에 층간소음에 대한 쪽지를 붙이러 갔을 때 불통인 위층 사람 대신, 나는 대문 밖으로 마중 나온 저 표지와 마주해야 했다.


몇 년 전, 아주머니를 뵌 적이 있다. 이른 오전, 6시 30분-7시 사이에 일어나 쿵쾅대는 발망치 소리와 뛰는 소리 때문에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소음이 업데이트되어 더 이른 시간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집 천장을 때리고 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하는 와중에 집에 있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 계단에 나와있다가 뵀다. 당사자를 보니 심장뿐만 아니라 갑자기 추워지면서 온몸이 미세하게 덜덜 떨렸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위층이 보복 소음을 내는 것 같아서 우리 집은 두렵다, 소음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알겠다고 하시면서 더 굉장한 소음이 따라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아주머니는 눈을 크게 뜨시며 보복 소음은 낸 적이 없을뿐더러 바닥에 깐 매트는 이사 오고 난 뒤에 깔고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다고 하셨다. 보복 소음이라고 느꼈던 사건의 경위를 말씀드렸다. 너무 힘들다고 전달하니 아저씨께서 알겠다고 하셨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을 뜯어내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렸다고 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때 처음으로 매트를 빼고 대청소를 했다고 한다. 사건은 일주일 전이었다. 너무나 최근이었는데 매트는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다'가 갑자기 대청소를 시작해 전부 빼다니. 그것도 종일 뛰는 소리에 못 이겨 말씀을 드린 직후에. 늦은 저녁 시간에.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종일 뛰다가

아래층이 아이들 뛰는 소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는 말씀을 드리니

아저씨께서 알겠다고 한 뒤에 갑자기 매트를 빼고 대청소를 한 격이 된다.


이해가 되지 않아 몇 가지 더 여쭙고 싶었으나 어떤 답이 나오든 이해는 불가능일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애들은 뛰어도 소파에서만 뛴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집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흔들릴 정도로 온 방을 돌아다니며 종일 뛰는 소리에 대해 여쭤보니 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가정예배가 있다고 했다. 가정예배를 하러 다른 가족들이 위층에 온다는 것이었다. 가정예배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수시로 있는 건가? 자주 한다고 해도 같이 사는 정도가 아닌 이상 이 정도 빈도는 아닐 텐데.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에는 고요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집에도 저렇게 울릴 정도면 애초에 뭔가를 정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닐 텐데. 예배를 위해 모였다면서 우리 집이 이렇게 고통스럽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왔는데 거기에 대한 자각은 전혀 없는 건가? 우리 집은 불지옥으로 만들면서 본인들은 믿음을 향해,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의문이 이어졌다.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진짜였을까?




어느 날 궁금해졌다. 여태 의문을 갖지 않다가 갑자기 스위치를 킨 것 마냥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위층은 교회에 가지 않는 건가? 요즘은 온라인 예배를 하고 있는 건가? 어째서 소음이 끊이질 않을까?


대문에 있던 교회 이름을 떠올리며 검색해봤다. 사이트가 나왔다. 교회 전경을 찍은 대문 사진 위로 온라인 예배를 한다는 팝업창이 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앨범을 클릭했다.


참, 우연은 신기하다.


수많은 사진 중에 선택한 게시글에 하필 위층에 거주하는 아저씨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따뜻한 공간에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렸다. 사진이었으나 위층에 사는 사람들과 직접 대면할 때처럼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방망이질쳤다.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이 떨려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사진 제목은 제자훈련 수료예배. 위층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을까.




우연은 무섭다. 마치 누군가 잘 짜 놓은 미로를 따라 걷는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우연이 겹쳐서 내가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됐다. 


종교에 대해 가진 생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나도 힘을 때 의지하는 종교가 있다. 운이 좋게도 내 주변에는 종교를 가진 분들 중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


나도 위층이 이사 오고 난 뒤부터 거세지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바라고 있다. 사정없이 휘두르는 폭력적인 소음을 멈추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미친 듯이 뛰는 소음 속에서 제발 멈춰달라고 울부짖은 적도 있다. 견딜 수 있는 일상의 소리만 듣기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지내기를 원하고 있다. 내 마음이나 신체에 문제가 생겨서 못 듣는 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던져지는 소음이 중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쪽의 기도가 강해질수록 다른 한쪽의 기도는 짓밟혔다. 기도도 기도끼리 싸움을 했다. 어떤 기도가 욕망대로 이길수록 어떤 기도는 무참히 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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