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심과 육회 사이에서

- 나와 다르지만 같은 사람들

by 새로나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중한 사람들과 한 끼니를 나누는 게 얼마나 값진 시간인지 깨달은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게 가장 소중했던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4년이 흐른 지금, 아버님과 같이 마셨던 막걸리 한잔, 아버님과 함께 먹었던 산나물과 두부와 한우, 함께 나누었던 끼니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같이 산다는 것은 같이 살기 위해 같이 살 수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고 보면, 결국 그게 가장 진한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망월사로 가는 전철을 탔다. 평소 타지 않던 노선이라서 그런지 덜컹거리고 흔들림이 심하다. 일본의 어느 의사가 썼던 책 한 권이 떠오른다. 책의 제목은 떠오르지 않고 내용만 떠오른다. 제목에 집착하는 것도 약간은 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상시 근육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손잡이를 잡지 않고 전철 안에서 허벅지 근육을 사용하며 견디는 방법을 소개했다. 그렇게 손잡이를 잡지 않고 허벅지 근육을 쓰며 망월사역에 도착했다. 멋진 식사를 위한 나름의 몸가짐이다. 살아온 얘기, 살고 있는 얘기, 살아갈 얘기를 나누러 가는 시간은 설렘의 시간이다.


2006년 처음 이 식당을 방문했을 때는 육사시미를 먹었다. 처음 가는 곳이 늘 그렇듯 메뉴에 대한 선택권은 초청한 사람의 몫이었다. 오늘도 메뉴 선택은 후배님이 했다. 육사시미 대신 육회를 먹었다. 금방 썰어놓은 싱싱한 고기와 배가 어우러지고 거기에 참기름과 간을 해서 내놓은 육회는 달콤했다. 원래는 소고기도 완전히 익혀서 먹었던 식성이 어느 순간부터 육회를 좋아하는 입맛으로 변했다. 사람의 입맛조차도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알 수 없는 일이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메인 요리인 등심으로 넘어간다. 등심은 고기가 아주 좋지 않으면 질긴 느낌이 나서 썩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건 제대로 하는 곳을 가보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마블링이 잘된 등심에서 나오는 육즙과 살짝 익은 고기가 어우러진 부드러운 맛 한두 점만으로도 입안은 아늑함을 느낀다. 돼지고기와 소고기가 각각 지닌 상반되는 효과에 대해 난 이기적이다. 돼지고기를 먹을 때는 돼지고기의 영양소를 한껏 떠올린다. 소고기를 먹을 때는 단백질의 효과를 떠올린다. 반대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맛을 느끼는 조건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만큼은 나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들이 누비고 다닌 푸른 초원을 상상한다. 이 등심들은 그 벌판에서 자란 맛 좋은 풀잎들을 되새김질하며 단련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약간은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잠시 풀밭에 누워 파란 하늘 위로 떠가는 구름을 보고, 옆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돌아본다. 눈만 끔벅끔벅 뜨고서. 뭔 말이 필요하겠는가? 자연의 품속에 기대에 있으면 편안할 것임을.


나는 나를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 나는 타인을 통해 성장한다. 그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고, 그를 통해 나를 알고 이해하게 되며, 그로 인해 나를 깨닫게 된다. 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나라는 자의식과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타인이라는 거울들은 내 주변을 감싼다. 음식을 대하는 순간은 그 거울들인 타인을 만나는 시간이다. 음식이 매개가 되지 않았다면 뭘로 매개하며 살았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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