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를 때 첫 번째 계단을 어떻게 내딛고 올라서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템포와 호흡, 그리고 신체 전체의 작동이 그 처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농담을 던진다. 시작이 반이라면 두 번 시작하면 끝이 아닌가? 그만큼 모든 일에 있어서 시작은 중요하다.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어떻게 맺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냥 바로 한 걸음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계단을 오르며 생각을 덜어내고 잡념을 덜어내는 것이 필요한 덕목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운동이므로 운동에 임하는 자세는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종아리와 허벅지와 엉덩이와 허리 근육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을 느껴본다. 몸이 작동하는 방식은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신기하다. 계단을 오르는 동작을 로봇에게 구현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대단히 근육과 관절의 복잡한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척척 진행됨을 알아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서 익숙해질 무렵 계단 창문을 열면서 밖의 경치를 감상한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비치는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산의 경계에서부터 바로 앞까지 모든 것들의 윤곽이 명확히 나타난다. 하늘은 쉴 새 없이 구름을 만들어 캔버스 위에 흩어놓는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그 미세한 움직임이 운동하는 동안 감지된다. 더운 여름날 오전부터 더위가 발걸음을 무디게 만들던 것과 달리 선선한 날씨가 경쾌한 발걸음을 도와준다.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오늘은 또 다른 즐거운 변화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그동안 계단을 오르면서 물건들이 적치되어 있어 시각적으로 불편했다. 물건이 없는 곳은 상관없지만 물건이 잔뜩 쌓여있는 층들을 지나칠 때면 걸음걸이도 조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최근 소방법에 따라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으므로 치워달라는 안내가 있고부터 서서히 치워지더니 오늘은 적치된 물건이 하나도 없는 계단을 오른다. 탁 트인 시원함에다 동선도 최대한 밖으로 돌면서 오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태극권 기본체조를 한다. 엘리베이터가 바로 오면 마스크를 쓰고 올라탄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기다리는 동안 상체운동을 해서 좋고 바로 오면 바로 타고 내려가서 곧바로 시작해서 좋다. 서두르지 않는 마음,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계단 오르기라는 운동을 즐길 수 있고 지속시킬 수 있다. 그게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갖게 되지는 않았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생긴 변화다.
일요일 아침의 홀가분한 기분이 한몫을 해서 그런지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생각 속에 메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천재가 아닌 이상 반드시 적어두어야 한다. 오늘은 마침 바깥 풍경을 찍기 위해 평소 안 들고 다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내내 운동을 했다. 거기 몇 자씩 끌적거려 두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땀을 흘려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일들은 늘 겪는 긍정적인 효과임을 알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창의적인 일이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동안은 그걸 제대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써야 할 보고서 목차를 새롭게 정리하고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넣는 일과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 정도까지는 나아갔지만 오늘처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와 실행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몇 가지 끄집어내는 경험은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그냥 책상에 앉아서 꺼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은 괴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고 좋은 생각도 떠오르는 반면 휘발성도 강하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미소를 띠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뭔가 멋진 꿈을 꾼 것 같아 책상에 앉아 기록을 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사라져 마침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계단을 오르며 떠오른 생각은 근육 속에 그 흔적을 새겨서 그런지 여운이 오래간다. 계단 오르기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아홉 세트를 끝내고 먼저 들어갔다. 둘이 계단을 오를 때는 페이스를 조절한다. 간격도 일정하게 두고 서로의 컨디션을 살핀다. 혼자 오르는 계단은 고독하다. 고독에는 어두운 고독과 즐거운 고독이 있다고 생각한다. 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혹은 그 생각을 덜어내면서 계단을 오르는 일은 즐거운 고독에 속한다. 덜애내고 채우는 메커니즘이 몸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몸의 의욕은 지속하라고 권하지만, 적당한 시점에서 그만둘 줄 알아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쉽지만 멈춘다. 집 앞에서 내린 뒤, 시간을 들여 다리 스트레칭을 한다. 종아리와 허벅지와 엉덩이에 쌓인 피로를 조심조심 풀어준다. 시작할 때의 스트레칭은 어딘가 모르게 뻐근한데 마치면서 하는 스트레칭은 시원하다. 어떤 운동도 끝나면 특별한 느낌을 선물한다. 계단 오르기도 마찬가지다. 몸은 땀으로 젖었지만 상쾌하고 개운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약간의 성취감도 보너스로 얻는다. 오늘 하루가 가볍게 흘러가리라는 좋은 느낌을 가지면서.
(25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