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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31. 2023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밥상 - 일상의례

1987년 대학에 입학하던 해 제기동과 보문동에는 한옥집이 즐비했다. 그 칙칙한 서까래와 대들보들이 지겨웠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다 사라지고 몇 채 남지 않아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 줄 만큼 귀하신 몸이 되었다. 그 한옥집의 이미지를 그대로 상호로 쓰고 있는 곳이 있다. 아주 가끔 들렀으나, 기억 저편으로 밀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편한 선배님의 안내로 이 가게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한 해동안 같이 일한 동료들과 밥 한 끼 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상의례 중 하나다. 한동안 신화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삶의 큰 줄기만 바라보았다. 탄생과 성인식, 결혼과 장례식 등 굵직굵직한 이벤트가 삶에 주는 의미를 쫓았다.


지금은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일상의례라는 말과 개념에 더 많이 다가서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일이 시작이다. 거울을 보고 세수를 하면서 지난밤 편히 쉰 몸을 깨우는 일 역시 여기에 속한다. 밤새 비워둔 위장에 비트, 당근, 브로콜리, 사과, 레몬, 토마토를 갈아 넣은 주스 한 잔으로 몸을 깨어나게 하는 일도 포함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동료들과 점심 한 끼를 먹는 일. 먹는 일속에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작업의 세계가 녹아든다.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하는 지식사회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밥 한 끼 하는 것. 


한 해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좋은 일도 있었고 좋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만 가지고 마무리를 하러 가는 길. 삶에 대해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잠시 시간을 내서 음식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 대화를 나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먹었던 음식에 대한 기억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밥을 먹기 전에 공복감을 최대한 즐기는 시간을 갖는다. 음식에 대해 몸이 반응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공복감과 포만감은 상호 보완적이다. 공복감이 깊을수록 포만감과 음식의 맛에 대한 만족도도 높아진다. 공복감이 선사하는 선물은 맛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아 몸이 스스로 자정작용을 통해 작동되지 않는 세포들을 정리하는 오토파지가 실행되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급하게 먹으면 나중에 뒤늦게 포만감이 찾아오는 타이밍을 놓쳐 과식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서 음식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음미하면서 식사하는 습관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간을 늘리면, 주인장이 만든 음식에 나만의 색깔을 입힐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다. 


드디어 국물 한 술을 뜬다. 오래 우려낸 국물에서는 닭 내가 나지 않는다. 전날 한 해를 마감하는 모임을 한 터라 치유의 음식이 필요했는데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빔벤더스 감독의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등장하는 뮤지션들은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쿠바 특유의 독주를 마신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치유해 줄 수 있는 닭고기 수프가 있기 때문이라고. 삼계탕의 국물이 닭고기 수프이므로 비슷한 음식의 다른 이름이리라. 


진하고 묵직한 국물에 후추와 들깨를 넣으니 고소함이 더해지며, 국물 속으로 몸이 딸려 들어간다. 국물이 몸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적정선이 36.5도보다는 조금 더 높은 상태가 좋다고 한다. 따뜻한 음식은 몸의 온기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데 큰 힘이 된다. 살의 부드러운 질감과 반은 죽상태가 된 찹쌀은 시원한 국물의 덤이다. 


지나간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새롭게 다가올 시간들을 맞는 축제와 같은 

지금 안에 밀려들어온 음식들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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