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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Oct 03. 2023

해장국 한 그릇, 인생 한 입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기회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뇌배선을 새롭게 정비하고 활력을 주는 일이라 반길 일이다. 다만, 에너지 소모가 많고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해서 몸이 약간 지칠 수도 있다. 예전 같으면 단 과자나 단 음료수로 허기를 메우면 에너지가 금방 충전되었다. 최근에 몸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이 이제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극도로 자제하고 있기에 그림의 떡이다. 첫날 도시락으로 점심을 했는데, 오늘은 시간적 여유도 있고 뭔가 허기를 촉촉하게 달래줄 음식을 찾아보았다. 유동인구가 많고 예전부터 다양한 맛집들이 즐비한 곳이라 최근의 주요 복합상가들의 가동률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단단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란 생각에 동료 한 명을 꼬셔서 길을 나선다.

대로 바로 옆 골목은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뭐 어떤가? 시간도 넉넉하고 아직 시장기가 절박하지 않아서 별 부담이 없다. 기다리는 동안 동영상을 봤는데 막상 음식점 앞에 서고 나니 동영상을 본다는 게 부질없다고 생각되었다. 맛에 있어서 그의 경험과 그의 생각과 말은, 나의 경험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맛있다고 해서 그 맛이 나에게도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맛으로 경험했던 해장국들을 소환해 본다. 선지해장국, 우거지해장국, 황태해장국, 다슬기 해장국, 그래도 해장국 하면 일감은 선지해장국이다. 


새로운 맛을 기대하는 기다림은 설렘과 공존하는 시간이다. 인내하는 시간과 깊이가 길고 깊을수록 새로운 맛은 강렬하게 내 몸 안으로 밀려들어옴을 그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약간 즐겁기도 하다. 일상언어에서 많이 쓰는 단어는 때로 사람의 언어가 가 닿을 수 없는 메시지를 명확히 제시해 준다. 그래서 자주 소환되는지도 모른다. 대신 자주 쓰는 말의 무게감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자주 사용하되 효능감 있게 사용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잘 가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짜>라는 말이 그렇다. 사전에는 '거짓이나 위조가 아닌 참된 것'이라고 적혀있다. 진짜라는 용어를 덥석 사용하고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배어있는 해장국은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 


사람마다 맛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다. 입안의 수백 개의 미각수용체가 반응하는 내용도 다르고, 장내 미생물의 성분들도 제각각이며, 맛을 전달하는 신경체계와 뇌신경세포의 배선도 각기 다르다. 한마디로 입맛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축적한 맛의 보편적인 특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평점을 찾고, SNS를 찾는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맛집이라고 입소문이 나면 대개는 그 맛에 수렴될 수 있다. 음식이 가진 보편적 특성과 맛의 개별성은 적절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평점을 찾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날 술을 마시지 않고 해장국을 먹으러 간 게 거의 처음인 거 같다. 첫맛의 깊고 그윽함에 몸과 마음이 따뜻하고 아늑해진다. 국물에는 우거지 향이 짙게 배어있어서 부드러움을 배가시켜 준다. 첫맛 뒤에 파와 고추슬라이스, 후추를 넣어 내 스타일에 맞는 국물로 재탄생시킨다. 따스한 국물은 입안에서 출발하여 목을 지나 위장을 감싸준다. 고소한 선지와 부드러운 우거지, 양지고기가 함께 어우러진 하모니는 해장국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겨우 점심 한 끼니일 뿐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내공을 한 사람에게 한 끼니를 넉넉하고 맛있게 나눠주는 일상의 위대한 여정을 맛본다. 나아가 해장국 속에 담긴 지난 세월의 그들의 삶과 그들의 대화, 식재료들이 마침내 한 그릇의 해장국으로 승화되는 그 경지를 맛본다.


한 그릇 안에 담긴 세월과 사람들의 내공과 노력, 식재료들이 자라던 들판과 햇빛과 바람과 비와 천둥을 떠올려본다. 한 그릇 안에서 그것들이 뭉쳐져서 가슴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간다. 한 그릇을 통해 그들의 인생이 마련해 준 한 입을 떠먹는다. 겨우 한 끼니일 뿐일 수도 있지만, 거의 모든 것의 한 끼니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음식을 먹으면서 그동안 팍팍한 삶을 견뎌온 동료의 얘기를 듣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딘 사람들이 이다지도 많은가? 내색하지 않고 견뎌온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뭉클한 감정과 동시에 서로 해장국을 먹고 있는 그 시선, 해장국으로 한 그릇으로 위로를 받는 그 잠깐의 찰나의 행복감이 뒤섞인다. 일상의 행복은 어디 먼데 있지 않고, 겨우 한 끼를 나누는 이 순간에 있다. 가뿐하게 비워낸 빈 그릇을 바라보며 비움과 채움의 움직임 속에 내가 살고 있음과 잃음과 얻음을 말한 동료의 말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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