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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Dec 21. 2023

ㅈ나 ㅈ같네요, 하나님

2022. 12. 17.      


큰아이가 엊그제 입원했다. 그리고 나는 상주 보호자로 함께 지내고 있다.      

2022년은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한 해가 잘 마무리되고 있는 걸까?     


“잘 될 것이다…”     


라고 사람들에게 당당하고도 쿨하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머니에게, 걱정하며 전화한 지인에게, 그리고 아내에게도.     


아무렇지 않지 않다. 


나는 아무렇다.


너무 아무래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데, 어디 말도 못 하겠다.      


  얼마 전 예배에서 부른 찬양 중 ‘주는 완전합니다’라는 가사에 울컥했다. 감동과 은혜, 그리고 감사의 울컥함이 ‘전혀’ 아니다. 신경질과 짜증, 그리고 원망이 뒤섞인 울컥함이다. 찬양을 부르다 눈물이 글썽해져서 고개 숙인 내 모습을 옆에서 보았다면 ‘은혜 제대로 받았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스크로 가려진 내 입에서는 ‘C8, 완전하기는 개뿔이 완전해? ㅈ나 ㅈ같네요, 하나님’라는 욕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그만했으면 싶다.


한 글자로 압축된 경상도 말로 외치고 싶다.     


“쫌!”     


  올해 초 어머니가 넌지시 건넨 말이 기억난다. 아는 목사님께 노총각 큰 아들의 결혼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기도하시다가 ‘그런데 그 집에 둘째 아드님 있죠? 둘째 아드님이 참 좋네요’라고 하셨단다. - 참고로 내가 둘째다 - 목사님의 기도와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 리가 있으랴마는, 그래서? 뭐가 좋단 말인가? 올해 내 꼴이 참 기가 찬다. 진급도, 취업도, 가족 건강도, 신앙도, 도대체 뭐가 말인가? 하긴 그 목사님이 ‘올해 큰아들 결혼합니다’라고 하셨던 것이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형은 여전히 총각이다. 


  냉소와 비관에 바짝 날이 선 나를 어찌하랴. 이노무 천하의 날라리 안수집사야....     


  입원 첫날 여러 가지 검사와 처치로 분주했었던 이유인지,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불편해서였는지 밤새 뒤척였고 새벽녘에 – 도저히 잠이 안 와서 – 병원 기도실의 새벽기도에 참여했다.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를 부르는데 공감이 안 된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제가 지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회피하거나 도망갈 힘도, 의지도 없다. 내가 감히 결정할 권한 같은 것이 있기나 한 걸까? 아니지 싶다. 내 차례면 그냥 하는 것, 아니 당하는 것이 아닐까? 기초군사훈련을 받던 시절이 떠오른다. 매 순간이 훈련이라기보다는 기합이었다. 교관의 절대적인 권능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복종을 넘어서 그저 당하는 것뿐이었다. 항상 뒤처지고 낙오하면서 ‘질질’ 끌려갔다. 거기엔 항상 끝이 있었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까? 십자가라는 것이 마치 그런 것이 아닐까?      


  새벽기도 후 기도실 뒤편에 기도요청 노트가 보이길래 “감사의 끈을 놓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적었다. 기도할 때마다 – 그마저도 식사 기도가 전부지만 - “하나님,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억지로. 


  혹시 이렇게라도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 조금은 있어서일까? 아니면 말한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그마저도 아니면 자기 최면, 자기기만일까? 모르겠다. 판단할 마음도, 의지도 없다.     


  의욕도, 활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현실을 방관하거나 포기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보살피고, 수고하는 의사·간호사 등 여러분들께 단정하게 대하고 있다. 아이 또한 크게 통증을 호소하는 상태는 아닐뿐더러 좋아하는 유튜브와 게임을 하며 병원 생활을 즐기고 있다.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차도가 눈에 띄어 다행이다. 단지, 병원 특유의 환경 – 의료진의 전형적인 복장, 의료기기, 냄새, 의료용어, 환자 가족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 등 – 이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기시키며 내 마음을 흔들지만 이 또한 무뎌지리라 생각하며 애써 기억을 방관한다.      


  아드님 편안하게 수발들면서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 비록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이지만 – 비치된 책도 읽으면서, 그리고 짬을 내어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씩 마시면서 잘 지낼 거다. 이후의 결과? 경과? 차도? 같은 것들은 어찌 될지 모른다. 내 의지대로 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새벽기도 시간 목사님의 말씀에서 한 가닥의 소망을 두어 본다.      


‘맡기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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