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A4 2~3장 사이의 짧은 글을 즐겨 쓰는 나는, 글의 구조를 짜지 않고 바로 워드 파일을 켠다. 머릿속에 대강 생각해 놓은 도입부와 결말로 글이 쑥쑥 잘 써질 때도 있지만 생각했던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아 결말이 달라지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꼭지들을 잘라낼 때도 있다. 글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며칠 동안 방치해둘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할 뿐 개요를 다시 짜지는 않는다.
이북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도 나는 기획서나 타임라인을 짤 생각은 없었다. 이미 웹진으로 발행되었던 글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웹진을 처음 시작할 때 기획 의도를 써놓은 게 있었고 원고들도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자가 출판이니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할 때처럼 기획서를 어디에 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머릿속으로 대충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고, 당시가 9월 초였으니 올해(2023년) 안에는 이북을 출간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러던 내가 문득 기획서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 건 친구들과의 회의를 위해서였다. 지난 6년간 직장 생활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을 꼽자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몰입도와 참여율이 올라갈수록 일도 재밌어지고 결과도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화장품 회사의 마케터였던 나는 1년에도 몇 번씩 신제품 출시 업무를 진행했다. 판매 채널과 수량을 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일즈팀과 긴밀한 협업이 필수였는데, 세일즈팀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냐에 따라서 세일즈팀은 든든한 연맹이 되어주기도 했고 누구보다 무서운 내부의 적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수입 회사 특성상 컨셉 단계의 제품과 실제품 특성이 맞지 않은 경우도 생기곤 했는데,(끈적임 없는 컨셉인데 끈적인다거나 베이비핑크라고 했는데 핫핑크가 온다거나 아무튼 끔찍한 일들이 꽤 있었다) 세일즈팀에게 통보식으로 소통이 된 제품은 마케팅팀이 막대한 비난을 받고 직접 부진 재고를 처리해야 했지만, 지속해서 세일즈팀과 의견 교류를 했던 프로젝트는 세일즈팀에서 나를 가엾이 여기며 제품을 털어낼 방법을 이쪽저쪽으로 알아봐 주셨다.
나와는 달리, <청춘양식> 친구들은 모두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저마다의 생업이 있었다. 친구들에게 이북 제작이라는 부담을 추가로 얹기 위해서는, 첫 번째 회의 때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프로젝트의 내용을 명확하고 매력적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그 방법을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작성한 것이 기획서였다.
기획서의 골자는 원고 투고용으로 만들었던 기획서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책의 제목, 저자 소개, 기획 의도, 목차 등등 출판사에 원고를 낼 때 함께 첨부하는 책 기획서의 형태였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내부용 논의 사항들을 2부로 덧붙였다. 출판 방식은 어떻게 할 건지, 가격은 어떻게 설정할 건지, 예상되는 제작 일정 등등. 어찌 보면 회사에서 신제품 출시를 준비할 때 필요한 정보들과 비슷했다.
9월 22일 첫 회의 때, 나는 기획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훑으며 친구들에게 프로젝트 개요를 공유했다. 나에게는 너무 명확했던 일들이 친구들에게는 새로운 것들이었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더 확실해졌다. 기획 의도와 핵심 컨셉을 제외한 이곳저곳에 빨간 글씨와 노란색 하이라이트가 쳐진 미완성의 기획서는 매달 회의를 거치면서 서서히 완성되었다.
우리는 이북을 만드는 과정 과정에서 다시 기획서로 돌아왔다. 나중에 더 구체적으로 적을 일이 있겠지만, 책 제목이 우리의 컨셉과 잘 맞는 것인지를 고민할 때도 각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야 하는 저자와 책 소개 글을 작성할 때도 기획서는 요긴하게 쓰였다. 서로의 아이디어에 대해 “괜찮다/별로다.” 이상의 “우리 타겟을 생각하면 이 목차가 더 맞지 않을까?” 같은 피드백을 줄 수 있었던 것도 기획서 덕분이었다. 기획서를 작성한 나의 유일한 의도는 ‘친구들을 잘 꼬셔보기’였는데, 막상 만들어놓고 보니 기획서는 내 기대와 의도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쓰였다.
나의 MBTI 중 결단코 변하지 않는 알파벳이 있다면 그건 “P”다. 우습지만 나는 내가 충동적인 성향인 데에 나름의 자부심도 있다. 무계획일 때 다가오는 우연이나 행운의 순간들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잘 짜인 형식과 계획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이를테면, 출판사 없이 이북을 출간할 때처럼.
이 브런치북은 5명의 친구들이 함께 5개월간
이북 <유튜브도 좋지만 가끔은 생각하며 살고 싶어>를 만든 여정을 담았습니다.
이북과 브런치북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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