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디 Jan 16. 2024

이북 제작 프로그램 Sigil: 정보와 컴퓨터의 쓸모

중학생 시절에 ‘정보와 컴퓨터’라는 과목이 있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한 사람 앞에 컴퓨터가 한 대씩 주어지는 컴퓨터 실에 앉아서 선생님이 워드 쓰는 법과 인터넷 검색하는 법을 알려주시는 동안 싸이월드를 통해 친구들과 방명록을 주고받는, 50분짜리 쉬는 시간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아이들의 정보 처리 능력을 과소평가한 게 그 수업에 아이들이 집중할 수 없었던 원인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은 교과서를 따라 친절히 워드 파일을 찾아서 여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데, 아이들은 이미 워드 파일에 온갖 잡소리를 적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 뒤 지뢰 찾기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꽂혀서 즐겁게 임했던 과제가 ‘나모에디터’라는 html 편집기를 이용해서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각자 주제를 정해 홈페이지를 만들고 내용도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하는 상당히 난도 높은 과제였기에, 그 완성도는 개인마다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대부분은 수업 시간에 함께 만들었던 기본 홈페이지 양식에 내용을 바꾸는 걸로 끝을 냈지만, 포토샵을 조금 다룰 줄 알던 나에게 이 과제는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반에서 가장 예쁜 홈페이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이 과제에 많은 공수를 투여했고, 그러면서 html 코드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실제 내가 구사하는 언어와 비교를 하자면, 초등학생 때 구몬학습으로 배워서 겨우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읽을 수 있는 일본어 정도? 그래도 조금 배웠다는 자신감에 일본인을 만나면 몇 마디 말이 나오는 내 일본어와 중학생 때 잠시 심취했던 html 코드의 문해력은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그 자신감은 이북 제작 프로그램인 시길(Sigil)을 시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시길이 html 코드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도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냉큼 프로그램을 다운받았다. 뚜껑을 열고 보니, 내가 나모에디터를 다루면서 배웠던 html 코드들은 대부분 시길에서는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프로그램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글의 스타일을 바꾸기 위한 웬만한 코드들은 프로그램 내 버튼들로 해결이 되기도 했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font size나 font color 같은 코드들은 미세하게 명령어가 달라 구글로 시길에서 사용하는 코드를 찾아보아야 했다. 게다가 홈페이지와 ePub은 비슷하지만 결국 다른 것이어서, 내가 이북 리더기에서 보는 책 스타일로 편집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부가 필요했다. 선생님 몰래 피카츄 배구나 했던 철없던 시절과는 달리, 샘플 원고를 하나 펴놓은 채로 유튜브의 영상을 돌려 보면서 차근차근 기능을 익혔다.


시길으로 이북을 만드는 과정


시길의 기능은 무궁무진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그래프나 수식이 필요한 문제집이 아니라 줄글로 이루어진 에세이였고, 그에 필요한 기능들을 익히는 데에는 3~4일이면 충분했다. 물론 파일을 만들다가 생긴 오류 때문에 쩔쩔맨 적도 있지만, 그 또한 이미 발행되어 있는 인터넷 정보들로 해결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주인공 자말 말릭은 인도 빈민가에서 살던 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식만으로 6억 원 상금이 걸린 퀴즈쇼의 결승전까지 오른다. 영화적인 과장은 있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닌 것 같다. 나도 20년 전에 배웠던 ‘정보와 컴퓨터’ 덕분에 Sigil을 배우게 된 걸 보면, 경험과 배움은 - 당장은 아니더라도 -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나 보다.



여담으로, 2020년과 2021년에 꽤 열심히 폴댄스를 배웠다. 용기 내 수업 등록을 한 뒤로도 수업에 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1시간 동안 뭘 배우지? 지상 훈련을 하나?’하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따라하니 수업 첫날부터 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세 달쯤이면 폴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배울 수 있었다.


가끔, 우리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강렬한 아우라를 가진 것들이 있다. 보자마자 ‘나는 안될 거야’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들…. 그런데 막상 발을 담가보면, 그들은 보기보다 훨씬 따뜻하다. 게다가 걱정이 많았던 탓에, 막상 시도해 보면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나는 정보와 컴퓨터도 안 들었는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드시더라도, 일단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세요. 자신감 충만했던 저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분명 금세 프로그램에 익숙해지실 거예요.






이 브런치북은 5명의 친구들이 함께 5개월간

이북 <유튜브도 좋지만 가끔은 생각하며 살고 싶어>를 만든 여정을 담았습니다.


이북과 브런치북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려요!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6313146


이전 03화 기획서 작성: 형식은 언젠가 도움이 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