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초능력 일기 18.
쓸모없는 제안으로 시작된 하루였다. 주말 동안 어느 그림 박람회를 다녀온 서빈이 캐리커처에 꽂혔는지, 아지트를 찾아온 사람들을 하나 둘 잡아놓고 제멋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와중에 실력은 나쁘지 않아서 받는 이들 모두가 ‘웬일?’이라는 감탄사를 뱉었지만, 이내 서빈이 웬만한 것은 잘 해내는 녀석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괜한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런 고로.
안 그래도 지저분한 서빈의 자취방에 부러진 샤프심과 연필, 뚜껑 닫히지 않은 펜이 굴러다니는 상태가 되었다. 연수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만년필 뚜껑을 밟고 미끄러졌으니 부연설명은 더하지 않아도 될 성싶다.
굳이 짙은 4B연필을 집어든 정한이 스케치북 위에 엉망으로 서빈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수는 와락,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몰려든 사내놈들이 정한을 둘러쌌다. 정한이 엎드려 그림을 숨기며 녀석들을 몰아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지우개를 집어 스케치북이 찢어져라 지워댔다. 그 소란 속에도 서빈은 캐리커쳐에 푹 빠졌는지 모여있는 친구들을 그리고 혼자 킥킥대고 있는 와중이었다.
너, 지우개똥 잘 치워라.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빈이 말했다.
칫. 안보는 줄 알았는데.
성준이 발에 차이는 지우개똥을 한 곳에 모으며 말했다.
우리 초등학생 때 그런 애 있었는데. 이름 뭐더라. 진짜 쓸모없는 능력이었어.
유나현이었나? 서빈이 어렵지 않게 답했다.
맞아. 유나현. 걔 지금 뭐 해.
서빈이 젠체하며 팔을 쭉 뻗어 연필로 구도를 잡는 시늉을 했다.
미술 하지. 쓸없능으로.
쓸없능. 쓸모없는 초능력을 모두가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 쓸모없는 능력은 정말로 소소했다.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어려운 능력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걔 능력이 뭐였지? 한수가 물었다.
서빈이 지우개 하나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이거.
지우개? 아니, 지우개똥. 지우개똥 뭉치기.
방 안의 모두가 서빈을 봤다. 지우개똥 뭉치기? 그거 잘 뭉쳐서 뭐 하냐.
걔가 아주 옛날부터 지우개똥 뭉치는 덴 도가 텄거든. 초능력이 그거기도 하고.
날렵한 선이 스케치북에 그어졌다. 서빈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짓고선 말을 이었다.
조형해. 지우개똥으로.
그러곤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여 팸플릿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쓸없능으로 먹고사는 녀석도 있다니까.
벙진 얼굴들을 보며 서빈이 덧붙였다.
“지우개똥으로 만든 세계에서 행복한 녀석이야. 자기 능력을 좋아하더라고.”
아무래도 즐기는 사람은 못 이기는 법이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