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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라 Nov 21. 2019

진수성찬이 아니면 어때

긴급 김치찌개

 
 남편과 짧은 연애 후 다시 사귀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 사귈 때만 해도 그 전 남자 친구가 군대 간 사이 내게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게 만들었던 사람이었는데, 다시 사귀려 할 때는 사귈 듯 안 사귈 듯 간을 엄청나게 봤었다. 사실 우리는 성향이나 취향이 반대라서 잘 맞는 편은 아니었고 그래서 처음 사귈 때 석 달의 기간 동안 지긋지긋하게도 다퉜었다. 남편은 섣불리 연인 관계로 돌아갔다가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되면 이제 친구 사이로도 지낼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 그런 불안감을 없애주기 위해서 나는 무엇인가 노력해야 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본 결과 이만한 진국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숱한 고행 끝에 찾아낸 숨은 보석 같은 이 사람을 누군가에게 뺏길 것만 같아 밀당 따위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 내가 찾은 방법은 요리였고,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그것이 운 좋게 통했던 게 아닌가 싶다.

 당시에 남편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원래 마른 체형 있지만 스트레스와 체력 소모로 인해 더 홀쭉해져 있었다. 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진로를 정해서 각종 요리 수업을 듣고 있었기에 그날그날 만든 맛있는 요리를 남편에게 조공으로 바치기 시작했다. 차마 먹을 걸 마다하지 못했던 남편은 본의 아니게 정기적으로 나의 얼굴을 봐야 했고, 사정이 있어 못 가는 날에는 은근슬쩍 안부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애매한 사이로 지내는 것에 슬슬 지쳐갈 무렵, 남편은 다시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고백을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그날이 아직도 생각난다.



결혼 후에도 남편은 내가 자신을 위해 밥을 해준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사귈 때부터 한결같이 하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는 날이 많아 자주 다퉜었는데, 그냥 하루에 메시지라도 한 통 보내주면 좋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고쳐지지 않았었다. 어느 날 내가 "아무리 그래도 언제쯤 들어온다는 연락조차 미리 해주지 않으면 저녁밥은 해주기가 힘들어."라고 선언한 다음부터는 퇴근 후 몇 시쯤 도착한다고 꼭 전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시 습관이 잘되지 않아 도착하기 직전에 황급히 연락을 하거나, 잊은 채로 미안하다며 집에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는 급하게 밥을 차려야 하는데, 가끔 마땅한 국이나 반찬이 없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땐 가장 빨리할 수 있고 통조림 햄과 김치, 양파만 있으면 간단하게 부대찌개와 김치찌개 사이의 맛을 낼 수 있는'긴급 김치찌개'를 끓인다.



 작은 냄비에 양파를 채 썰어 넣고 그 위에 스★같은 햄을 얇게 포를 뜨듯이 썰거나 수저로 퍼서 넣어준다. 자른 김치와 국물도 그 위에 올리고 참기름, 맛술, 간장을 살짝 둘러서 볶는다. 햄에서 나온 기름과 양파의 향, 김치 국물이 섞이며 지글지글 끓기 시작하면 1~2분 더 볶다가 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너무 묵은 김치라면 후추를 살짝 넣어도 좋고 밥 지을 때 생긴 쌀뜨물을 물 대신 넣어 끓이면 더 좋다. 대파나 두부 같은 게 있으면 추가해도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결혼한 지 오래돼서 살림에 도가 튼 아는 언니에게 배운 방법인데 워낙 간단하니 밥을 짓는 동안 뚝딱 끓여낼 수 있어서 정말 말 그대로 긴급할 때 요긴하게 먹을 수 있다. 끓이기만 하면 되니 그동안 계란 프라이 한 가지 더 하고 김, 멸치볶음 같은 반찬 조금만 추가하면 간단하게나마 집 밥 느낌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 그 사이 옷을 갈아입은 남편은 반찬도 옮기고, 밥도 푸고, 수저도 놓고 눈치 빠르게 같이 상을 준비한다. 그리고 찌개부터 한 숟가락 떠먹고는 금방 끓였는데도 왜 이렇게 맛있냐며 괜히 너스레를 떤다. 연락 한 번 안 해주는 바람에 헐레벌떡 밥상을 차리느라 심통 난 마음도 어느새 가라앉는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연애할 때 해주던 진수성찬에 비해 너무 초라한 밥상이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오래 만나도 우리가 여전히 잘 지내는 건 가리는 음식 없이 내가 해주는 건 다 맛있다고 해주는 남편의 착한 입맛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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