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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라 Nov 17. 2019

다들 집 앞에 과일나무 하나쯤은 있잖아요?

감말랭이와 무화과 잼

결혼 후 우리는 아주 오래된 빌라에서 살게 되었다. 고장도 자주 나고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오래된 시골집 같은 구수한 냄새도 풍기는, 아주 오래된 집이다. 처음에는 많이 불편하고 툭하면 재건축 이야기가 돌아서 집에 정이 붙질 않았다. 타지 생활 12년 만에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첫 우리 집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장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평균 연령 70대인 이웃분들과 지낸다는 것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사 오기 전 리모델링할 때부터 술 마시고 욕하는 윗집 아저씨부터, 아무리 공사 중이라지만 마음대로 들어와서 훈수 두고 가시는 여러 어르신들을 겪은 후엔 앞으로 참 피곤하겠다 싶은 두려움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이웃 어르신들은 새벽잠이 없으셔서 주말에 꿀 같은 늦잠을 자다가도 어르신들이 밖에서 내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깬다든지, 한낮에 집 앞마당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시며 막걸리 파티를 하시고 틈만 나면 집 창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신다든지 하는 등등의 크고 작은 짜증 유발 사건이 일상이 되었다. 항상 집 앞에 상주하고 계시니 인사를 하며 지나가면 애는 언제 가지냐, 살이 찐 거 같은데 애 가진 거 아니냐며 물어보시기도 하고... 한두 번은 웃으며 넘어가지만 나중엔 머리에 "저희는 아이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고요, 임신이 아니고 그냥 배 나온 거예요. "라고 써 붙이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저런 불편함에도 익숙해지고, 다른 장점들을 찾아갈 무렵이었나. 어느 날 집에 들어오는데 현관문 손잡이에 묵직한 검은 봉지가 걸려 있었다. 귀여운 감 몇 개가 안에 들어있었다. 집 앞마당에 감나무가 있는데, 옆 통로 어르신께서 먹으라며 전해주신 것이었다. 깎아서 먹어보니 예쁘게 생긴 모양과 달리 아직 좀 떫다. 껍질은 깎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건조기에 넣고 감말랭이를 만들었다. 원래 곶감도 떫은 땡감으로 만든다고 들어서 곶감 비슷한 느낌으로 잘 말려보니 떫은맛이 거의 사라지고 쫄깃하고 달달한 간식이 완성되었다.

그러고 보니, 집 앞에는 무화과나무도 몇 그루 있어서 종종 따오기도 했다. 도시가스 정기 점검하러 오는 여사님께서 "이 동네는 왜 이렇게 집집마다 무화과가 있어요? "하고 물어볼 정도로 주렁주렁 잘도 열렸다. 시중에 파는 것처럼 잘 익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크기도 작지만, 따서 며칠 두면 후숙이 돼서 제법 달달해진다. 그렇게 따서 모아 둔 무화과로는 잼을 만들었다. 무화과는 갓 따면 잘린 부위에서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나온다. 끈적함이 사라지도록 잘 씻어서 잘게 자른 후 설탕을 넣고 잠시 재워둔다. 바닥이 깊고 평평한 냄비에 넣고 나무 주걱으로 잘 저어주며 끓여준다. 어느 정도 점성이 생기면 불을 끄고 미리 소독해둔 유리병에 넣고 뚜껑을 닫아 거꾸로 세워두면 진공 상태로 밀폐된다.

지난해 이렇게 두 가지를 잘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과도 나눠먹고 집에서 유용하게 잘 먹었다. 이 집에서 살면서 알게 된 새로운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사람도 그렇지만 집도 100% 맘에 들지 않아도 몇 가지 큰 장점들 때문에 그것을 잊곤 한다. 감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때 되면 가지치기하고 잘 가꾸어주신 어르신들 덕분에 얻은 건 감과 무화과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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