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왜 나는 이랬다 저랬다 할까?"
"왜 말은 괜찮다고 해놓고, 서운함이 자꾸만 느껴질까?"
why노트를 쓰다 보면 아이, 남편에 관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에 대한 내 마음은? 그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널을 뛰었다. 나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복잡한가? 왜 그리 모순적인가? 왜 일관되지 못한가? 감정과 생각이 얽혀서 머리는 늘 분주했다.
감정은 한 줄이 아니다. 얽혀있는 실타래였다.
하루는 신랑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들고 왔다. 꽃을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정말 사 올 줄 몰랐다. '뭐지? 이렇게 감동할 일인가? 고마워!' 하는 마음과 함께 '아니! 이렇게 사 올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안 사준 건데? 왜 화가 나지?'
사람의 감정은 직선이 아니다. 좋아하면서도 미워하고, 이해하면서도 서운하다. 사소한 대화 속에도 감정은 몇 겹으로 겹쳐 있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하고 적는 순간,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를 몰랐던, 내가 나를 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화가 났다. 고작 햄 한 조각을 먹은 게 그렇게 정색하며 "안돼! 내 거야!" 할 일인가? 갑자기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서운함이 미친듯이 느껴졌다. 그 뒤엔, '다행이다! 자기표현을 분명히 하네!' 하며 안도한다. 이 무슨 일인가?!!!!
나는 왜 아이가 햄 한조각도 안 준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까?
질문을 던지고 나니, 내 마음이 사소한 것에 집착해 스스로를 나쁜 엄마로 몰아갔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한 시간을 단 5분도 내지 못한 때였다. 감정의 깊은 뿌리에는 아이를 위해 희생한 나의 피로함과 깊은 외로움이었다. 내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아이가 하는 말에 흔들렸던 거다. 내 안의 결핍은 아이의 말에 화라는 감정으로 튀어 올랐다.
그날 이후, 내가 힘들 때, 서운할 때, 스스로에게 이유를 묻고 대화하지 못하면 계속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질문으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정을 온전히 느껴주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왜 사람은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어릴 적 '정답'을 찾는 방법만 강요당했다. 복잡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쓸데없는 것, 시간 낭비이니 느끼지 말고, 지식 공부만을 할 것!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버려버리고, 상황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남는 방식만을 터득해 버렸다. 스스로를 단순하게 유목화해서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해내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원래 그래.
나는 성격이 원래 그래.
하지만 질문은 알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질문은 선을 긋지 않는다. 열어두고. 흘러가게 한다. 질문은 나를 증명하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내 안의 깊이 있는 내면 아이를 만나도록 인도해 주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타인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은 모순덩어리다. 사랑하면서 다투고, 공감하면서도 외면한다. 나 자신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타인에게도 관대해진다.
질문은 정리를 넘어 수용으로 이끌어준다. 감정을 정리하며, 있는 그대로 감정을 느끼고 바라보는 연습을 가능하게 해 줬다. 반복되는 질문과 답을 찾으며, 나는 나와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를 점점 받아들이게 도왔다.
why노트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사람은 원래 복잡한 존재이고,
그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어린이라는 것을.
오늘도 쓴다.
나는 왜 친구가 내 안부를 챙기며 '마지막 강의 마무리 잘하고, 다음에 만나!' 하는 말에 울컥했을까?
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질문은 언젠가 나를 답으로 이끈다.
질문은 사랑이다.
질문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