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응원한다는 것.
이제 막 틴에이저에 접어든 아이가, 좀 컸구나...라고 최근에 느낀 순간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업고 튄다는 선재를 아이도 업어버리고야 말았거든요.
제가 보는데, 곁에서 같이 보던 아이가 드라마의 줄거리와 두 주연 배우에게 빠져,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차 안에서 짬이 날 때마다 "엄마 한 번만~"을 외치며 드라마의 특정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신드롬급의 인기를 끌고 있는 변우석 배우가 열 살 남짓 아이의 눈에도 멋져 보였는지, "엄마는 좋아하지 마! 나만 좋아할 거야!"라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요. 어린 마음에도, 같은 사람을 엄마와 함께 좋아하는 건 뭔가 이상한 일로 느껴졌나 봅니다. 이런 아이가 재미있어서 "왜에~~ 엄마도 좋아할 거야!!!"라고 반격하니 "엄마는 아빠 있잖아. 자꾸 그러면 아빠한테 이를 거야!"라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우리 꼬마.
진심으로 '강타오빠'와 남자 친구사이에 누가 더 진정한 사랑인지 고민하던 저를 지켜보며, 음반 가게에서 얻어온 강타오빠의 첫 개인앨범 포스터를 내밀며 [너의 덕질을 응원해 줄게. 질투하지 않을게!]라며 어필하며 스멀스멀 스며들던 것이 지금의 아빠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듯하네요. 후훗.
이렇게 아빠가 아닌, 다른 성인인 남성을 보며 '멋있다'라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딱 아이 즈음의 나이에 TV 속의 배우에 홀딱 빠져버렸던 제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은, 10살 인생에 처음으로 엄마가 조금 늦게 자도 된다고 허락해 준 날이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바로 자야 하니, TV 앞에 이불을 펴고 온 집안의 불은 다 끈 채 보았던 인생 첫 '어른들의 드라마'였죠.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재벌남주'라는 설정의 주인공은 미국 유학파에, 회사에서도 이미 안정된 위치의 실장님이고, 취미로는 색소폰을 부는.. 울끈불끈 한 근육의 소유자였습니다. 거기에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감아야 하는 극빈한 환경에서 살아온 가난한 신데렐라를 사랑하고 아끼며 위기의 순간에 슈퍼맨처럼 나타나 구해주는 테리우스의 실제 이름은 "차인표"였습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콩닥콩닥 뛰는 마음에 드라마 속의 장면과 허밍음이 인상적이었던 OST속의 '띠리릴라라이 레이레~~~'를 머릿속으로 무한반복한 그날이 제가 '차인표'라는 배우에 홀딱 빠진 첫날이었습니다. 그렇게 꼬마소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 차인표라는 배우는 그 이후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이었던 신애라 씨와 결혼까지 하며 드라마의 스토리가 현실로 이어갔죠. 21세기에 현빈과 손예진이 있다면, 20세기에는 차인표와 신애라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당시, 스포츠 신문에 매일 이 두 연인들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뒤 많은 시간이 흘러 젊고 생기 넘치던 이 분들도 자식을 키우며 중장년의 배우가 되셨죠. 봉사나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꾸미거나 육아에 관련된 방송들에 자주 출연하시는 것을 보며 부모로의 삶과 사회 내 선배로서의 삶에 비중을 두며 살아가시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굉장히 의외의 뉴스를 의외의 곳에서 마주했습니다. 차인표 배우님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삼은 소설을 출간하셨었고, 그 소설이 옥스퍼드대 아시아·중동학부가 한국학 전공 필수도서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소녀의 마음속에 '왕자님'이라는 단어의 어원처럼 남아 있는 배우가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도 생경했는데,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두 번 놀랐습니다.
이미 이 책이 3번째 책인 것은 물론, 250페이지 분량의 책을 쓰는데 거의 10년이 걸렸다더군요. 2009년 다른 제목으로 출간했었지만 잘 팔리지 않아 2018년 절판되기도 했다는 이 책은 참고서로 사용하는 것이 논의되면서 복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누가 알아주지 않았는데도 묵묵히 '작가'라는 길을 걸어오셨다는 사실에 끈기가 남다르시구나 싶었습니다. 한데, 알고 보니 차인표 작가님 개인의 노력만이 아니더군요.
그의 아내인 배우 신애라는 “당신은 배우보다 작가로 잘 될 것”이라며 응원했다. 차인표는 “저도 저를 안 믿는데 아내가 ‘언젠가 잘 될 거다. 빨리 그렇게 앉아서 쓰라’며 저를 칭찬해 주고 몰아댔다”며 “(옥스퍼드대 필수도서로 선정되고) 아내가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며 너무 기뻐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 신애라였다’는 진행자 말에 “1명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보도기사 중 (7월 12일 자, "아무도 관심 없는 제 책을 왜 교재로?" 차인표 질문에 옥스퍼드대가 한 말)-
오랜 시간, 차인표 작가님의 곁에서 그의 또 다른 길을 응원하고 지켜봐 준 것이 아내인 신애라 씨였죠. 그리고 이런 그녀의 지지와 응원에 대해서 "1명만 있으면 된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차인표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며,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과 이야기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상낙원으로 알려진 하와이의 카우아이 섬은, 이곳에서 행해진 심리학 연구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린 곳이기도 합니다. 1950년대까지 이 카우아이섬의 섬 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죠. 학교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청소년 비행 역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즉, [불행한 삶의 예정지 같은 곳]의 대명사가 된 이곳에서, 심리학자 도널드 D. 화이트(Donald D. White) 박사의 주도하에 카우아이 섬 주민들의 삶과 생애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주민 전부는 물론 심지어 태중의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삶의 여건과 그로 인한 생의 형태를 추적관찰한 거죠. 개인정보나 사생활 보호가 중요한 21세기에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기도 쉽지 않지만, 실험의 시작 시기가 1954년이었기에 가능했던 듯합니다. 종료시점까지 참가인원의 90% 이상이 남아있었던 결과 아동들의 심리적, 사회적 발달을 장기간에 걸쳐 관찰하고, 외상 사건과 그로 인한 심리적 결과를 분석한 근현대사의 유례없는 연구 기록으로 남게 되죠.
그런데, 이들의 삶을 지켜보던 연구자 에미워너 박사는, 기존의 가설로 설명 안 되는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극빈층에, 출생 시에 위기가 있었고 가정불화가 극심하거나, 부모는 별거 또는 이혼 상태에 부모 중 한쪽이 알코올중독이나 정신질환인 아이들 약 200여 명 중, 아무런 문제 없이 성장한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동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가정 내 환경]이 최악인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생을 이룬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거꾸로 의아한 상황에서 떠오른 질문.
무엇이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유지시켜 주는가?
그 답은. 바로 "인간관계"에 있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은 바로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 인생 중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동기에 경험하는 긍정적인 관계 형성과 지지가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시키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지 알려주었죠.
2024년 9월 현재, 약 60일을 남겨두고 있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히든카드로 등장한 부통령 후보 J.D. 밴스. 미국판 '개천에서 난 용'의 실제인물인 그 역시 아이였던 밴스의 인생에 있던 [단 한 사람]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끄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죠.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과, 이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넷플릭스의 동명의 영화로 이미 먼저 알려졌던 J.D. 밴스가 살아온 환경 역시 하와이의 카우아이 섬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낙후된 백인 노동층 마을에서 미혼모로 자신을 출산하고, 약물중독에 빠져있는 엄마 아래서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란 그의 어린 시절은 매일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엄마가 함께 죽자고 소리 지르며 운전대를 잡고 폭주하고, 이런 엄마를 피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집으로 살려달라고 뛰어들어 울부짖는 영화 속의 어린 밴스를 보며 아이에게 지옥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변의 비슷한 환경의 아이들이 10대에 처음 시작하는 절도로 서서히 그들의 부모와 다르지 않은 삶으로 침몰해 가는 와중에 밴스를 이들과 다른 삶으로 이끈 것은 '할머니'였습니다. 비록 자신의 딸은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지만, 손자마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생각한 할머니는 그가 달라지기를 바라며 관심을 놓지 않고 그의 곁에서 계속 소리칩니다. 격렬하게 반항하며 그냥 자기를 내버려도라는 밴스에게 할머니는 강경하게 소리칩니다.
"I don't care you hate me. I ain't in it for popularity. You gotta take care of business, go to school, get good grades to even have a chance. (네가 나를 미워해도 상관없어. 나는 네가 날 좋아하건 말건 상관없다. 네가 할 일 잘하고, 학교도 (빠지지 말고) 다니고,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해. 그래야 기회가 있을 거다."
이미 약물중독으로 살아있지만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딸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엄격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밴스의 곁을 지킨 할머니의 끊임없는 이야기는 어린 밴스의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아주 조금씩 달라진 일상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예일대 법대까지 진학한 밴스는 이후 미국 내 사회적 문제와 계층 이동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2022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뒤, 2024년 현재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서있습니다.
다 큰 성인이었던 차인표 씨에게도 '단 한 사람'이었던 아내 신애라 님의 지지는 특별한 성과가 드러나지 않았던 긴 시간을 버티는 힘이 되었습니다. 배우에서 작가로의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 이어진 끊임없는 지지는 결국 아주 예쁜 꽃을 피웠죠. 불운한 환경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는 '한 사람'을 곁에둔 아이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고, 그런 아이들 중 하나는 이제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중요성을 알리는 위치까지 가서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죠.
지금 제 곁에도 언젠가는 예쁜 꽃이 될 새싹이 하나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자라는 내내 울타리도 필요하고, 거름도 필요하겠지만 그 모든 것들 중 제일 필요한 것이 '믿음과 지지'라는 사실을, 이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를 만나기 어려운 아이들의 곁에도 부디 좋은 어른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래봅니다.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선생님이나 이웃의 어른일 수도 있으니까요. 단 한사람의 관심과 응원으로 바뀔 수 도 있는 우주를 생각하며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의미로 오늘은 제 우주를 지켜주신, 제 작은 삶에 지치지 않는 지지를 보내주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습니다. 덕분에. 라며 말이죠:)
참고자료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4/07/12/YF6JQXS3MBDE7PAOO5BOBZHJ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