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 ①
코로나의 끝 무렵.
귀국을 결정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 일년 전에 뉴욕을 떠나있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냥 한국 들어가면 진짜 서운해... 꼭 우리집에 와서 머물다가 가야해:)"
그렇게, 친구의 초대로 콜로라도의 아스펜이라는 도시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가서 머물며 알게된 아스펜이라는 도시는, 미국 내 부와 예술 그리고 백인 위주의 엘리트 네트워크가 응축되어 있는 독특한 곳이었습니다. 겨울엔 스키, 여름엔 다양한 페스티벌과 야외 활동이 활발해서 부유층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억만장자들의 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했죠. 크지 않은 도시의 조금 눈에 띄는 집들은 모두 신문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의 집이거나 별장이었습니다. 일부 브랜드들은 아스펜에 매장이 있다는 것 만으로, 자신들의 브랜드를 특징 짓기도 하는 그런 곳이었지요. 그런 곳에서 제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그 곳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여름이면 강에서 카약을 타고, 부모님들과 함께 어떤 전파도 닿지 않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캠핑을 즐깁니다. 봄과 가을에는 하이킹이 일상이고, 겨울이 오면 학교 운동장 뒷쪽에서 바로 이어진 리프트를 타고 스키 슬로프로 향하죠. 집 안에서 TV나 패드를 가지고 노는 시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대도시인 뉴욕과 비교해서도 서울의 아이들의 미디어 사용이나 소셜 네트워크 사용이 상대적으로 굉장히 높은 빈도와 노출인 상황을 지켜보며 문득 그 곳의 아이들은 어떤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죠.
친구의 답은 이랬습니다.
"애들은 대부분 8~9학년(중3~고1)이 되어서야 스마트 폰을 갖게 되는 편이고, 어릴 때는 애플 워치 같은 기기를 가지고 있는 애들도 드문 편이야. 더 커서도 스마트폰 같은건 안 쥐어주는게 낫다는게 중론이고. 우리 가족도 얼마전에 Wait Until 8th*에 등록했는데, 나중에 보니 학교 애들 대부분이 동의했더라구."
(*Wait Until 8th (https://www.waituntil8th.org/)는, 8학년까지 아이들에게 스마트 기기를 주지 말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단체로, 한 가정이 이에 동의하며 등록을 하게 되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중 누가 등록을 했는지를 공유해주는 방식으로 부모들의 연대를 돕는 웹사이트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기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애쓰는 부모들의 목적은 한가지였습니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온라인 상의 경험에 빠져들기 보다는 실제 "삶"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더 많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었죠.
그 후, 지난 가을에 뉴욕에서 저희 아이와 비슷한 나이의 자녀를 키우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 아이들의 스마트폰 소유나 사용 방식 등에 대해서 물어보았죠. 마침 그 즈음, 뉴욕주는 "SAFE for Kids Act"를 통해서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부모의 동의 없이 18세 미만에게 “중독성 피드”(algorithmic feeds)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으로 2024년 6월 주지사에 의해 서명이 완료 된 뒤 시행 준비 및 규칙 마련 단계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아이들 사이의 전반적인 스마트폰의 보급률은 한국보다 훨씬 낮은 편이고,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인스타그램, 틱톡) 부모들의 경계심또한 한층 높게 느껴졌습니다. 이미 법적인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 부분들을 보았을 때, 그런 차이가 좀 더 와닿았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디지털 세상으로 부터 지키고, 현실 세계의 다양한 경험에 노출시키는 일은.....언제부터 이렇게 의식적으로 애를써서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을까.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은 이 변화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현실을 몸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직접 만지고, 냄새 맡고, 기다리고, 지루해하고, 어색해하는 시간들. 그 느리고 비효율적인 경험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전제는, 어느새 낡은 신념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대목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등장한 “현실 특권(Reality Privilege)”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자 벤처 캐피탈리스트인 마크 앤드리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의미 있는 경험, 아름다운 환경, 풍부한 자극과 매력적인 사람들로 가득 찬 현실 세계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현실이 없다고 말이죠.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히려 온라인 세계가 더 풍요롭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문장을 읽으며 묘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경험이 점점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 구조를 바꾸기보다는 ‘대체 가능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쪽을 택하는 그 모습과 태도에 말이죠. 그 말의 이면에는 이런 전제가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아이는, 어차피 그 소수에 속할 테니까.
하지만 이 책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는 경험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번번이 피로해죠.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들겠죠.
'차라리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것을 제공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런 체념은 기술과 결합하며 더욱 공고해집니다.
세상은 점점
‘공부하지 않아도’,
‘외우지 않아도’,
‘직접 가보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은 기계가 대신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친절한 위로처럼 들리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의 소비뿐 아니라, 아이들의 경험 반경까지 조용히 재단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잃어볼 기회도, 몸으로 실패해 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만 이동하죠. 지루함은 제거되고, 기다림은 최적화되며, 감정은 관리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책, "경험의 멸종"의 목차는 일종의 경고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직접 경험의 내리막.
대면 상호작용의 필요성.
손으로 써야 배울 수 있는 것들.
기다림과 지루함의 기능.
감정 길들이기.
기술로 매개된 쾌락.
소멸하는 장소, 개인화된 공간.
이 목차들을 하나로 엮으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직접 경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대면 상호작용이다. 손을 써야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기다림과 지루함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감정과 이해가 있다. 기술을 통해 매개된 쾌락이 일상이 되고, 인간의 감정이 기계가 인식하고 반응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지금, 우리는 이 흐름을 무심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공공의 장소는 점점 사라지고, 남아 있는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각자의 고립을 택합니다. 같은 거실에 있던 저와 남편은 같은 공간에 머물긴 했지만 서로 각자의 핸드폰을 쳐다보며 서로 다른 세상을 부유합니다. 공간은 같을 지언정, 소통하지 않으며 서로의 존재는 최소화되죠.
이 풍경은 ‘경험의 멸종’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경험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은, 그것을 사치로 인식하기 시작한 우리의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있어야 하고, 공간이 필요하며, 어른의 결단이 요구되는 일.
아이와 함께 느리게 걷는 산책, 아무 생산성도 없어 보이는 놀이,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태도는 생각보다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은 곳곳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놓아버리면 안된다고 말이죠.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의 선택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그런 어떤 것...이 경험으로 남게 될까요. 일부의 소유물이 되고 말까요?
경험이 사치가 된 사회에서,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장 먼저 포기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요?
다음 편에서는, 이 경험의 격차가 어떻게 양육과 계층의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볼까 합니다:)
본 글은, 1월 8일 먼저 게재된 적 있습니다만 '비하인더 캠퍼스' 매거진에 게재되지 못하여 재발행되었습니다.
이 글의 후속편을 1월 15일 목요일에 만나보세요:)
참고 서적: 경험의 멸종_크리스틴로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