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입시가 보여준 계층
2월이 되면 미국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기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Early Decision(ED) 전형으로 지원한 학생들 중 상당수가 이미 합격 통보를 받기 때문이죠.
얼리 디시젼(ED)이란, 합격하면 반드시 등록해야 하는 제도라 이들은 연말이면 사실상 “갈 학교가 확정된 학생”이 됩니다. 한편 살짝 다른 Early Action(EA)이나 Restrictive EA로 합격한 학생들은 12월~1월에 발표를 받지만, 최종 진학 여부는 5월 초까지 선택할 수 있죠.
한국의 입시 환경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수시로 이미 대학을 확정한 학생들과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같은 교실에 있는 것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랄까요. 학교별로 확정된 합격자 리스트를 공지하기도 하니 긴장과 부러움, 시샘과 고민이 교실안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 흐르는 중입니다.
바로 이 시기면.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흐르는 말이 있습니다.
“걔는 레거시(legacy)로 붙었잖아.”
레거시란, 부모가 해당 대학 동문일 경우 합격률이 올라가는 우대 제도죠.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패스트트랙”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위의 말을 조금 풀어서 해보자면 "걔는 부모님이 그 학교를 졸업해서, 성적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으로 간거잖아."가 되는거죠.
Legacy는 어떻게 특권이 되는가
하버드 법정 공판 과정에서 공개된 내부 문건에 따르면, 레거시 지원자의 합격률은 일반 지원자의 5~6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언론 보도에 드러난 입학생의 약 14%가 레거시라는 추정과, 그중 상당수가 백인·고소득층 출신이라는 수치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레거시로 입학했다고 응답한 학생들의 약 40%가 부모 소득이 미국 상위 1%($500 K 이상)라는 분석 결과 또한 보도된 바 있습니다.
즉, “부모가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가 “학생 자신이 무엇을 해왔는가”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한국에서도 크게 낯설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아버지가 어느 대학 출신”, “가문의 사회적 자본”이 입시 전반의 정보력·사교육·경험 접근성을 좌우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으니까요. 다만, 미국의 레거시 입학제도는 훨씬 더 제도적으로, 표면적으로 명시된 특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ffirmative Action을 폐지했는데, 왜 Legacy는 유지되는 것일까?
여기서 한가지 함께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2023년 대법원은 Affirmative Action(인종 기반 우대입학)을 위헌으로 판결한 사실이죠.
우선 그 정의를 잠시 알아볼까요?
Affirmative Action(인종 기반 우대입학 제도)
: 역사적으로 차별받아 온 인종 집단(흑인·히스패닉 등)에 대학 입학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인종’을 평가 요소 중 하나로 반영하던 제도. 즉, 대학이 지원자의 인종을 고려해 다양성과 형평성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장치.
그럼, 이런 제도를 왜 폐지 했을까요?
당시 판결의 내용은 “입시는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논리가 핵심 근거였죠.
하지만 같은 원칙을 Legacy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부모의 학력과 사회적 지위가 합격률을 높여주는 관행은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특혜라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egacy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듯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번째.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기부금(Endowment)"
미국의 사립대학은 기본적으로 기부금(endowment) 의존도가 매우 높습니다. 대학은 레거시를 버릴 수 있을 만큼 중립적이지 않죠, 아니 그럴 수가 없스니다. 레거시는 단순한 우대가 아니라 대학 재정의 일부니까요.
하버드·예일 같은 초대형 대학은 수십조 원 규모의 기부금을 갖고 있고, 스탠퍼드·MIT·프린스턴도 이 자산에서 나온 수익으로 연구비·장학금·운영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합니다. 이 구조에서 동문·기부자 네트워크는 대학 재정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레거시 제도는 그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실질적인 장치가 되지요.
이러한 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스탠퍼드의 Cal Grant 탈퇴 사건]입니다.
Cal Grant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저소득층·중산층 학생 지원 장학금입니다.
학생이 갚을 필요 없는 ‘그랜트(grant)’ 방식이고, 사립대에 진학하는 학생의 경우 연간 최대 약 $9,000 이상을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내 대학 중 특히 사립대 학생에게는 매우 중요한 재정지원 통로죠.
그런데 2023년부터 캘리포니아주는 이 장학금 제도 개편 논의에서 “레거시(동문·기부자 자녀) 우대를 유지하는 대학은 Cal Grant 참여를 제한하겠다”라는 조건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준이 도입되자, 스탠퍼드는 Cal Grant 프로그램에서 아예 탈퇴했습니다.
이 결정은 미국 교육계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Cal Grant는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대표적 공공 장학금입니다.
스탠퍼드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대학으로, 기부금(Endowment)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36B(미국 대학 3위).
그럼에도 스탠퍼드는 “레거시·기부자 우대”를 지키기 위해 저소득층 학생에게 돌아갈 공적 지원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이죠. 이는 몇 가지 그간 표면으로 떠오른 적 없는 몇가지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레거시는 개인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재정·기부 구조의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점
대학들이 레거시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기부금 구조에 있다는 점
‘공정성’보다 ‘기부자 관계 관리’가 우선되는 현실
그래서 스탠퍼드–Cal Grant 사건은 Affirmative Action(인종 기반 우대)은 폐지되었지만 부모 배경 기반 우대는 대학이 먼저 나서서 지키고 있는 구조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두번째. 뜨거워지기 어려운 감자라는 사실.
인종 문제는 미국 사회의 핵심 갈등이지만, 레거시는 “상류층 전반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어 공개적 반발이 적은 편입니다. 레거시를 유지하면 누가 이득을 볼까요?
백인 상류층 → 당연히 혜택
아시아계 고소득층 → 점차 동문을 배출하며 혜택 증가하고 있음
흑인·히스패닉 고소득층 → 마찬가지
즉, 일정 소득 이상인 가정은 인종을 초월해 ‘우리도 언젠가 레거시를 누릴 수 있다’라는 이해관계를 공유합니다. 그러니 정치적 반발이 적을 수밖에 없겠죠. 누군가를 손해 보게 하는 정책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레거시는 인종을 넘어 계층적 특권을 세대 간에 전이하는 장치지만 정치적으로는 뜨거운 감자가 될 이유가 없는 제도이기에, 은밀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Affirmative Action 폐지 이후 나타난 데이터
자 그럼 Affirmative action이 폐기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초기 통계는 다음과 같은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MIT: 흑인 비율 15% → 5%, 히스패닉 16% → 11% 감소
하버드: 흑인 18% → 11.5%, 히스패닉 16% → 11% 감소
(관련 보도: The Guardian / AP News)
반면, 이런 경향도 보인다고 해요.
Legacy·기부자 자녀 비율은 유지 혹은 상승했고
Early Decision 전형에서 Legacy 효과는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아시아계 학생들은 성취도는 높지만 Legacy 비율이 낮아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피부) 색깔을 보지 않는 입시”가 시작된 듯 보이나, 실제로는 계층 기반 특권이 드러나기 쉬운 구조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상황
한국의 경우 ‘제도적 레거시’는 없지만, ‘구조적 레거시’는 존재합니다.
한국 대학은 미국처럼 “동문 자녀 우대” 전형을 공식적으로 운영하지 않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이 사실상의 구조적 레거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정 대학 출신 부모 → 높은 사교육 접근성
학군·학교 선택 → 내신·비교과 경쟁력 격차
가정의 정보력 → 해외 경험·스펙·활동 기회 접근성
사회경제적 자본 → 입시 설계의 질적 차이
제도적으로 명시된 레거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가문·계층 배경이 입시 성공률에 영향을 주는 구조인 셈이죠. 최근에는 한국 상류층 가정의 자녀들이 미국 명문대(특히 ED 기반)로 진출하는 비율이 증가하면서
“한국형 레거시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이비리그에 한국 유학생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게 1990년대 이후라, 지금 대학에 들어가는 세대는 대부분 “1세대 동문 자녀”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레거시의 정의 자체가 ‘동문 자녀’라서, 한국인에게는 구조적으로 아직 많지 않기도 하구요.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았을 때 한국에서도 입시 결과가 부모의 사회적 자본을 따라가는 현상이 세대 간에 재생산되고 있으며... 형태만 다를 뿐, 작동방식은 미국의 레거시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
Affirmative Action이 폐지되면서, 미국은 ‘형식적 공정성’을 강조하는 구조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Legacy는 그대로 남아, 오히려 계층 기반 특권이 더 뚜렷해지고 있는 상황이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제도적 레거시는 없지만, 사회경제적 배경이 교육 기회를 결정하는 구조는 이미 굳건해졌고 현재 변화하고 있는 교육 제도는 이 방향으로 더욱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 이대로 괜찮을까요?
강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의 하구에는 다양한 생태계가 존재합니다. 강에 사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그 사이 어딘가에 서식하는 물고들도 있는 덕분에 그 어느곳에서보다 다양한 생태계를 만날 수 있죠. 대학도 마찬가지인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문화적/ 환경적인 차이를 가진 타인들이, 공통적으로 '학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모여들어 다를 수 밖에 없는 가치관과 생각들을 한 공간안에서 섞어가며 완전히 새로운 사고를 펼쳐나갈 수 있는 곳. '내가 가진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배우며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 바로 그곳이 대학일테니까요. 균질하고 동질한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는 사고의 폭은 좁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양성을 확보하지 않는 대학이라는 공간은 고등 교육기관으로의 사명을 다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그러니, 지금 이런 세상의 기틀을 정하고 있는 기성세대인 어른들로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출발선을 깔아주고 있는가?”
“그 구조는 세대를 거치며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라고 말이죠.
자료 출처
1) MIT·흑인·히스패닉 비율 하락 관련
The Guardian — US universities see declines in Black and Hispanic student numbers after affirmative action ban
2) 하버드·사립대 흑인 비율 감소
AP News — Elite colleges enroll fewer Black students after affirmative action ruling
3)로스쿨(T14)의 인종구성 변화
Reuters — US law schools see significant drop in Black and Latino students after affirmative action ban
https://www.reuters.com/legal/government/law-student-diversity-held-steady-after-affirmative-action-ban-aba-says-2024-12-16/
4) 에세이·스토리텔링 우대 증가 (InGenius Prep 분석)
InGenius Prep — How College Applications Changed After the Affirmative Action Ruling
https://ingeniusprep.com/journal/harvard-affirmative-action-storytelling-admissions/
5) 계층 기반 우대의 효과에 대한 논문
ScienceDirect — Affirmative action and its race-neutral alternatives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4727272300021X
6) 퍼센타일 플랜(Top 10%)·공립대 모델 분석
U.S. Department of Education — Percent Plans in College Admissions: A Comparative Analysis of Three States' Experiences.
https://eric.ed.gov/?id=ED472484
7) affirmative action 폐지에 대한 Rennie Center 분석
https://www.renniecenter.org/blog/unpacking-impact-supreme-courts-affirmative-action-ruling
8 ) Legacy 제도 유지·방어 논리 (Command Education 분석)
Command Education — Why legacy admissions still exist — and why they matter most in the early rounds
https://www.commandeducation.com/does-legacy-still-matter-for-ivy-league-admission/
9) 스탠퍼드·Cal Grant 탈퇴
San Francisco Chronicle — Stanford opts out of Cal Grant reform that bans legacy admissions
https://www.sfchronicle.com/bayarea/article/stanford-cal-grant-legacy-20814598.php
10) 레거시 지원자의 합격률은 일반 지원자의 5~6배에 달한다는 기사
https://www.thecrimson.com/article/2018/6/20/admissions-docs-legacy/
‘Legacy and Athlete Preferences at Harvard’ 논문에서는=> 동문 자녀 포함 특별지원자(ALDC) 중 레거시 그룹이 일정 조건 하에서 7.5배까지 입학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분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모들의 소득에 대한 내용까지 명시되어 있으니 한번 읽어보셔요!:)
https://studentsforfairadmissions.org/wp-content/uploads/2019/09/legacyathlete.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