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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있을 때가 마지막인 것 처럼

그 때 가봐야 알지

by 숭숭현

그 때 가봐야 알지

내겐 친언니처럼 여기는 사촌언니가 있다. 이모의 딸이자, 우리 언니의 20대 일부를 함께했을 만큼 우리 남매의 또 다른 형제같은 막역한 사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방학이면 엄마에게 이모네에 가고 싶다며 애걸복걸했고, 덕분에 어릴 때부터 서울 문화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특히 사촌언니는 나와 동생에겐 말할 수 없이 든든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매해, 매 방학 때마다 만날 수 있던 건 아니였다. 사촌언니 또한 나와 10살 차이가 났기 때문에 내가 중고등학생일 땐 사촌언니는 일자리를 찾아 다니는 취업생이었다. 언니는 외국에 자리를 잡게 됐고, 한동안 못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를 통해 언니 소식을 듣게 됐다. 언니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건강검진을 받게 됐는데 암 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초기라서 항암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다시 외국으로 나가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의도치 않게 갑자기 멈추게 된 것이다.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까. 상상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다.


가녀린 모습과 달리 너무나 씩씩했떤 그녀는 오랜시간 항암치료를 마치고 암과 절대적으로 헤어졌다. 꽤 오랜 시간 그랬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서울에서 실습을 해야 하는데 묵을 때가 없어서 산촌언니의 원룸에서 묵었다. 내 상황을 듣고 당장 오라며 마음의 여유를 보여준 것과 달리 언니의 방은 매우 좁았다. 서울살이의 현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 좁은 방마저도 얼마나 감지덕지인지 몰랐다. 5평 정도 되는 언니의 집에서 한달간 부대끼며 지냈다. 우리 언니의 빈자리를 사촌언니가 잠시 채워준 것만 같아서 너무나도 고맙고, 의지가 됐었다.


실습처에서 퇴근하고 온 어느 날 저녁, 좁디 좁은 방 한켠에서 접이식 상을 펼쳐 놓고 언니와 맥주 한잔 들이키며 얘기를 나눴다. 내가 졸업하고 서울로 취업하면 지금보다 더 넓은 방을 구해서 같이 살자며, 꼭 그러자며 약속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상상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급하게 취업이 됐고, 바로 출근을 해야해서 당장 집을 구해야만 했다. 게다가 혼자서 집을 구해서 계약까지 해야하는 상황이라 이곳저곳에 발품 팔기 보다는 회사 근처 동네에서 적당한 집을 구하기로 했다.


'이번 집 계약 끝날 때까지 돈을 모아서 다음 번 이사할 땐 언니랑 같이 살 집을 구해야지'


언니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간의 고마움을 보답하고 싶어서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역시 나에게 '다음'은 사치였을까. 내가 취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들려 온 언니 소식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추적 관찰을 하며 병원 정기 검진을 다녔음에도 하루 아침에 갑자기 암이 재발해서 온 몸에 퍼져서 손 쓸 수가 없는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탓을 하는 거였다. 내가 더 좋은 집을 구해서 언니랑 같이 살았더라면, 언니를 조금 더 마음 편히 생활 할 수 있게 했더라면 언니가 조금 더 건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손 쓸 수 없는 상태라는 말에 나 또한 내 안에 불안감이 손 쓸 수 없이 나를 덮쳤다.


그녀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말과 생각을 너무나도 예쁘고, 곱게 하는 사람이다. 언니와 대화를 하면 불쌍한 사람도, 못생긴 사람도, 성격이 안 좋은 사람도 없을 것만 같았다. 당연히 알거라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 감정을 솔직하고, 순수하게 말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10살 차이가 나는 나한테도, 12살 차이가 나는 내 동생에게도 어른행세를 하기 보다는 언제나 동등한 입장에서 얘기를 해주니 언니나 누나보다는 세상 경험이 많은 친구 같았다. 그래서인지 언니랑 같이 있으면 말을 예쁘게 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지고는 했다.


언니에게는 미국인 약혼자가 있었고, 그 약혼자를 따라 미국으로 치료하러 떠날 예정이었다. 마지막 끄나풀을 잡기 위해 언니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언니가 미국 가기 전에 인사를 하기 위해 1시간이 넘게 지하철 여행을 하며 이모네로 가서 언니와 이모를 만났다. 언니는 상태에 비해 너무나도 건강한 모습이었고, 심지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에서 조금 수척해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니가 미국에서 기적으로 치료가 돼서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한달 있다가 크리스마스에 보자' 라는 말을 믿었다.


언니는 크리스마스가 돼도 돌아오지 못 했다. 돌아오지 않아도 언니가 살아 있다는 거에 감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긴 여행을 떠났다.


또 언니를 잃고야 말았다. 우리 언니가 떠난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 또 믿고 의지하던 사촌 언니가 떠나다니, 누군가가 날 고문하는 것만 같았다. 언니의 인사를 믿지 말았어야 했다. 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봤어야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언니 대신 내가 이모한테 뭘 해주면 좋겠는지 캐물었어야 했다. 언니가 어떻게 해야 마음 편히 눈감을 수 있는지 물었어야 했다. 꿈 같은 미래를 기약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준비를 했어야만 했다.


'아빠 기일 때 봐' 우리 언니도 그랬고, '크리스마스 때 봐' 사촌언니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미래적 약속을 믿지 않는 편이다. 그때 가봐야 아는 거니까. 그 때가 돼 봐야 진짜니까.


예쁜 조카도 태어났다고 보여줄 겸 조만간 언니한테 인사하러 다녀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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