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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진한 할머니의 사랑

육신은 죽어 없어져도 사랑은 평생 산다

by 숭숭현

나의 유일한 할머니, 외할머니 뿐이다. 나의 어릴적엔 나이 많은 엄마 같았던 할머니. 아빠가 돌아가신 후 한 때 할머니 댁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면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따라 시장을 가고, 할머니가 빨래 비누를 만들고 계시면 괜히 기웃거리며 할머니를 졸졸 따라 다녔다. 심지어 목욕도 할머니가 시켜줬다. 할머니 손이 어찌나 맵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이태리타올로 내 등을 뻑뻑 밀어 주시는데 그 어린 피부가 다 벗겨질 것만 같아서 '아파!'라고 소리 꽥 질렀다가 할머니한테 등짝을 맞았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가 너무 좋았다. 때론 무서웠지만 호탕한 웃음소리에 화끈한 성격에 정이 많던 하나뿐인 할머니.


할머니 옆에는 언제나 우리 엄마가 있었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없었던 탓에 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셨다. 할머니는 우리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주택 집을 떠나서 우리 집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오셨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로 이사를 오셨고, 엄마는 주기적으로 할머니댁에 들리며 할머니를 보살폈다. 할머니가 가까이 계신 덕분에 나는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엄마와 강아지와 함께 할머니댁에 무조건 갔다. 뵐 수 있는 한 최대한 할머니를 봬려 했다. 최대한 내 기억 속에 우리 할머니를 많이 많이 가득 가득 담아두고 싶었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 본가까지는 5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미루고 싶지 않고 가는 세월 최대한 잡아가고 싶어서 한달에 한번씩 본가에 내려갔다. 못해도 두달에 한번은 꼭 갔다. 봄의 기세가 짱짱한 5월은 내 생일이 있는 달이다. 내 생일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어서 겸사겸사 본가에 내려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본가로 내려가기로 한 주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어느 날 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몇 년 만에 또 심장이 저릿하면서 쿵 떨어졌다. 아직도 떨어질 심장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할머니 덕분에 본가에 며칠 일찍 내려가게 됐다. 심지어 온 가족들을 만나게 생겼다.


100세 시대인 요즘, 80대의 죽음은 너무 이르 것 아닌가. 오랜만에 또 하나님을 탓했다.

'할머니 한번만 더 만나게 해주지, 곧 가려고 했는데. 진짜 너무하세요'

어버이날이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데려가시느냐고 하나님을 탓했다가도, 우리 할머니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하나님 곁에 가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했다. 처음으로 죽음 앞에서 나오는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항상 너무하다고만 했는데,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다니. 그래도 그나마 덜 아쉬웠던 건, 본가에 갈 때마다 할머니를 봬러 가서 다행이었다 싶었다. 나 그래도 잘했다 싶었다. 내 죄책감을 덜려고 할머니를 찾아갔던 것이었나 싶은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할머니는 떠나면서 내게 행복할 길을 남기고 가셨다. 마음에 젖어 있느라 현실을 외면한 채 곪아가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살지 마라. 너 힘든 길이다. 힘들면 네 엄마가 속상하다'라고 하시는 듯 했다. 할머니 덕분에 지금의 나는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때 우리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면 너무 끔찍하다. 엄마랑 나는 아직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때를 얘기하면 지금의 나를 얘기하곤 한다. 나는 얘기한다 '할머니가 나 살렸어'.


나는 내 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할머니를 생각한다. 아직도 본가에 가면 할머니를 모신 곳에 꼭 한번쯤은 다녀 오려고 한다. 엄마랑 같이 할머니한테 갈 수 있을 때 더 많이 가두려고. 엄마랑 같이 할머니를 더 많이 추억하려고.


할머니가 살린 내 인생을 나는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간다. 내가 누린 이 모든 걸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며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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