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때문에 보지 못했던 사랑해달라는 신호
4년 전 10월까지만 해도 나에겐 형제가 있었다. 11월, 나는 갑자기 외동이 돼 버렸다. 대개 외동들은 형제가 있는 기쁨과 행복감을 모르는 편이다. 그들과 달리 나는 형제가 존재함으로써의 기쁨과 부재함으로써의 슬픔 모두를 체감함 채 외동이 돼 버렸다. 이걸 축복이라고 해야하나 벌이라고 해야하나.
내 동생은 어릴 때부터 자기 주장과 성질머리가 대단한 아이였다. 유년기 시절에는 어쩔 땐 엄마보다 더 나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여느 남자 아이들처럼 불도저같은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면서 나와 엄마는 동생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우집 유일한 남자이자 잠자는 사자의 콧털같은 아이였던 내동생은 파란만장한 인생의 마지막 문장을 너무 빨리 완성해버렸다.
동생은 술을 좋아했고 특히 술 먹고 새벽에 나에게 전화해서 푸념을 늘여뜨리길 즐겨했다. 잠에 예민한 나는 한번 깨면 다시 자기 힘들었고, 수면이 부족해서 일하다가 졸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동생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아는 밤이면 미리 걱정을 하며 잠이 들었다. 웬만하면 나 아니면 누가 내동생의 푸념을 들어주겠나 싶어서 다음날 중요한 일 없이 평범한 일상이 예정되어 있는 날은 동생의 주정을 기다리며 잠들었다. 어떤 날은 동생의 술주정을 열심히 받아주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무음으로 해두고 잔다는 톡을 남기고 자기도 했다. 동생의 마지막 전화가 걸려왔던 날은 무음으로 해두지도 않았는데 2통의 부재중이 남겨지도록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잤다. 대체 그날 밤은 내 귀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자다가도 진동 소리에 바로 깨는데 왜 하필 동생의 마지막 전화 소리는 절대적으로 들리지가 않았는지가 아직도 의문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술에 취해도 깨는데 말이다.
동생이 떠나고 난 뒤에 깨달았다. 평소 무뚝뚝하고 다 괜찮은 듯 보였던 동생은 사랑이 너무 고파서 새벽마다 술에 취해서라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현실이 주는 안정감에 매몰되지 말자며 정신을 다잡고 살아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의 감사함에 무뎌지는 게 사람인가 보다. 그 많은 가족들을 떠나보냈으니 남은 가족들한테 만큼은 아낌없이 부끄러움 없이 사랑을 표현하자는 마음을 품고 살아 감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안심하며 무뎌진 감각으로 살았다.
그 덕분에 이제는 같이 나누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투닥거리다가그럼에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형제가 없다. 나는 둘째였는데 외동이 되었다. 첫째 같은 외동, 막내 같은 외동, 둘째같은 외동. 다 내차지가 되었다. 어쩔 땐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진짜 파이팅 넘치게 살아야겠다 싶다가도 어느 날은 그 몫이라는 게 너무 무거워서 허리가 펴지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이면 침대에 푹 파묻혀서 어릴 때도 울어보지 않았던 꺼이꺼이 울음을 내뱉곤 한다.
동생 덕분인지 몰라도 엇나간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든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 바른 훈육을 적시에 받았더라면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텐데 싶어서. 유년기란 뭘까, 성장이란 뭘까, 사랑이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죽고 살게 만드는걸까? 30년 남짓 산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나의 보호자인 엄마가 순리에 따라 내 곁을 떠날 때가 온다면 그래도 동생이 있으니 같이 슬퍼할 수 있겠지, 그땐 지금보다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가 좋으려나’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종종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상상조차 사치였고 헛된 것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부모가 있건 형제가 있건 이 세상에 나 혼자 달랑 남겨졌다고 생각해봤어야 한다는 걸. 나도 모르게 또 현실에 안주해서 당연히 사랑하는 이들이 나와 같은 시간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아빠나 언니는 이미 못 만난지 10년이 넘어서 후회마저 희미해졌는데 동생은 나름 최근이라 그런지 후회가 막심하다. 한달에 한번 내려가던 본가도 어느 날은 두번 가볼껄 싶고,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동생한테 고생한다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 좀 줄 걸 싶고, 동생이 ‘미쳤냐’라고 할 지언정 애교있는 누나가 돼서 사랑한다고 좀 많이 할 걸 하는 후회들을 늘여놓자면 꼬박 이틀은 걸릴 것 같다.
사랑하는 이들을 이렇게나 많이 떠나보냈는데 아직도 미련하게 비슷한 실수를 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사는 내가 싫다. 피부에 닿는 햇빛, 계절에 따라 바뀌는 시골 풍경,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을 때 편하게 만나러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다는 것 등등 사소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매일을 선물처럼 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사랑하는 마음을 매일같이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넘치게 찬란하게 더 많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전할 걸 싶은 후회가 짙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번 더 사랑과 감사를 전해봐야지. 그래도 언젠가는 또 후회하겠지. 그래도 오늘만큼은 ‘이만하면 됐다’싶을 만큼 넘치게 해야지.
사랑하는 그대들, 사랑한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