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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를 위해
오늘 당장의 행복을 미루지 않기

나의 소비 가치를 바꾸고 간 그녀

by 숭숭현

세계 하루 평균 사망자 수는 무려 16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예비 형부가 떠난 이후로 내 측근의 죽음은 한동안 잠잠했다. 동생의 친구 혹은 나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사람들의 죽음은 간간히 들려왔지만 다행히도(?) 내 가족들과의 허망한 이별은 한동안 없었다. 그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고민들만 하면서 살아 갈 수 있었다. 내 기준엔 안일한 시기였다. 사실, 남은 가족 중에서는 갑자기 절.대 죽으면 안되는 사람들 뿐이라 그들이 죽는다는 상상조차도 하지 않으면서 지냈던 것 같다. 남은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또 떠난다면 내 세상 절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너무 치명적일 게 뻔해서 상상조차 못했다. 불안한 마음을 갖는 것 조차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너무 안일했던 탓일까. 내가 21살이 되던 해의 무르익은 가을에 언니가 갑자기 떠났다. 한순간에 갑자기. 난 시험기간이라 시험을 치루고 있었고, 다음날 시험을 위해 잠자리에 누워 막 잠들었었다. 그때 언니가 만나고 있던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간혹 통화를 하긴 했지만, 서로 연락하기 굉장히 어색한 시간에 내 핸드폰 화면에 오빠 이름이 떴다. 불길한 기운을 직감했고,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당장 수술 동의서가 필요해서 언니가 있는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다만 언니와 나의 거리는 200km라는 게 문제였다. 새벽이라 언니한테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택시를 타고 가야만 했다. 난 200km가 넘는 거리를 새벽에 할증까지 붙여가며 시외로 택시를 타고 달렸다. 무슨 정신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말그래도 패닉 상태로 '살아만 있어달라'는 간절한 마음만 싣고 갔던 것 같다.


언니는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는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상태로 간신히 살아만 있었다. 내 세상은 무너졌다. 엄마가 나이 들어서 우리 곁을 떠난다면, 그래도 언니가 있으니 나는 괜찮을거야 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었다. 내가 슬픔에 빠졌을 때 나를 건져 올려줄 유일한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나의 동아줄이 갑자기 끊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태가 된 것이다. 마음 한편에 모시던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날 미워하는데 내가 가늘고 길게 붙들고 있었던 거였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그 믿음을 이제 그만 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언니를 아빠 곁으로 보낸 후, 엄마와 함께 언니 짐을 정리하던 때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언니의 모든 걸 알고 싶을만큼 언니를 너무 사랑했고, 언니를 너무 따라하고 싶었고, 내게는 너무 멋지고 예쁘고 세상 제일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의 현실을 마주하니 언니가 너무 외로웠겠구나, 너무 힘들었겠구나 싶어 심장이 아려왔다. 아리다못해 전류가 흘러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언니가 형부를 떠나보내고, 늦깍이 신입 간호사로 도시에 나가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지런히 돈을 모으려고 애썼다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수순대로 나이에 맞게 학업을 마치고 시작한 젊은 간호사들 사이에서 나이라는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몇 배로 노력했을 언니를 생각하니 지독하다 싶으면서도 그 이면의 외로움이 느껴져서 숨 쉴 수 없을만큼 슬펐다. 그런 언니가 내 대학 학비에 돈을 보태라며 엄마한테 천만원을 보냈다는 걸 언니가 떠난 후에야 알게됐다. 아마 대출을 받았겠지. 그렇게라도 장녀 노릇을 하고 싶었겠지.


언니의 죽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내게 남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미래의 나를 위해서 현재의 나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것. 지금의 나를 위해 행복을 너무 멀리 미루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언제 삶을 등질지도 모르는데, 미뤄서 무얼하나라는 생각이 한동안 가득했다. 그렇다고 오늘의 행복을 위해 탕진하자라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하나라도 날 위해 평소와 달리 고민하지 않고 하겠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때 부터 하루 용돈 500원을 받으면 매일매일 모아서 사고 싶었던 필통을 사거나, 옷을 사거나했다. 언젠가 필요할 때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저축을 했다. 엄마가 혼자서 우리 셋을 키우느라 힘들테니 내가 사고싶은 건 내가 사야지 라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커왔다. 내가 사고 싶은 것보다 동생이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걸 사주는게 행복했다. 그런데 언니가 떠나고 난 뒤로 바뀌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비싸더라도 한 두개쯤은 샀다. 그러다보니 혹시모를 미래를 위한 돈을 모으는 것보다 지금 당장의 행복을 즐기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려 했다. 사실 잠재워지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그래도 덜 억울할 것 같긴 했다.


지금은 더 확장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말, 같이 하고 싶은 걸 미루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애정하는 이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것 또한 내 행복이니까. 언니가 누리지 못한 행복까지 내가 배로 누리며 살다 죽을거다. 언니가 억울하지 않게. 그리고는 어느 날 언니를 만나게 된다면 내게 좋았던 것들을 다 나눠줘야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같이 즐기고 싶다. 좋은 옷이 있으면 같이 입고, 맛있는 게 있으면 같이 먹고, 좋은 곳이 있다면 같이 가고 싶다.


언니, 내가 더 빨리 커서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려서 그러지 못했다는 게 미안할 뿐이야. 내가 언니 몫까지 더 많이 즐길게. 그러다 시간이 되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언니의 행복을 위해 내 것까지 다 몰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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