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났던 사람이 오늘은 이 세상에 없다니
어릴적 나는 명절이면 딱히 유대감이 없는 친조부모님댁에 엄마 손을 꼭 잡고 갔다. 아빠가 살아 계실적엔 매번 가다가 아빠가 떠나고 난 뒤, 우리도 사춘기 청소년이 될 즈음까지도 가다가 마침내 안 가게 됐다. 불편한 가족 모임 속에서도 그나마 내가 마음을 기댔던 사촌언니가 있었다. 나보다 두세살 많았었나...
어릴 때 내가 바라 본 언니는 자존심 강하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어른들한테도 무례하지 않는 선에서 할말 다 하는 똑부러지는 사람이였다. 어른들이 보는 언니는 소위 말하는 날라리였겠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키도 표준 키를 가진 멋진 언니였다.
어릴 적 아빠를 땅에 모시던 날 내게 '너는 왜 울지 않냐' 물었던 언니이기도 하다. 다 큰 지금에야 든 생각이지만, 아빠를 떠나보낸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린 아이에게 물어 볼 말이었을까 싶다. 어렸던 사촌언니도 단지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을 뿐이였다. 어른들은 그런 언니의 순수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 때, 하교를 하고 집가는 길에 사촌 언니를 만났다. 어디 가냐며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다음에 보자며 가던 길을 갔다. 언니는 나한테만큼은 활짝 웃어주는 편이었고, 여전히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나는 우연히 만난 언니가 무척이나 반가웠고, 길에서 나보다 몇 살 많은 언니오빠들 틈에 섞여 있는 언니가 되게 멋져 보였다. 심지어 '내 동생이야' 라고 말해주는 언니가 너무 좋았다.
언니를 만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사촌언니의 장례식장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지 말라며, 엄마만 다녀오겠다며 갔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나한테 사촌언니가 또 있었던가 생각해봤다. 머리는 부정하며 믿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빠가 떠났을 때처럼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으며 쿵쾅쿵쾅 뛰는 내 심장소리만 내 귓가에 가득하게 들렸다. 내 몸은 언니 소식을 듣는 순간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했나 보다.
며칠 전 만났던 언니의 웃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곧이어 후회했다. 괜히 반갑다며 언니 손한번 더 잡아볼 걸, 언니한테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청해볼 걸, 내가 언니를 너무 좋아한다고 문자라도 보내볼 걸 하고. 다음에 볼 수 있을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냥 스치듯 인사만하고 간 게 너무 후회스러웠다. 이때부터였을까, '다음에'라는 말이 싫어 졌다. 다음에 내가 살아 있을 줄이나 알고 뚜렷하지도 않은 미래를 약속하는 걸까. 아니 약속이라고나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아빠가 떠난지 5-6년 정도 됐을까, 사촌언니까지 떠나버리니 어린 나이에도 자꾸만 사색을 즐겨하게 됐다. '삶이란 뭘까','사는거란 뭘까','어른들이 말하는 산 사람은 산다는 말이 이런건가' 등등. 15년도 다 살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 둘이나 떠나보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들이 더 소중해졌다. 더 애틋해졌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이 나일지 상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만나는 인연이 너무 다 소중하고, 심지어는 만나고 있는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물론 사람 쉽게 죽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생각보다 쉽게 머물렀던 자리가 차게 식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온기가 따뜻할 때 최선을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