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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너무 쉬운 말, 사랑해

아빠, 사랑해

by 숭숭현

행동은 비교적 쉬워도 말로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 사랑한다는 말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어려워한다. 다 커버린 자식에게 부모가 하는 것도, 다 큰 내가 부모님과 형제에게 하는 것도 어려운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초/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랑해","고마워","미안해"라는 말을 잘 하는 축에 속한다. 언제부터 내가 이랬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초등학생 때 아빠가 돌아가신 후 한참 뒤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마을에 빨래를 할 수 있는 샘터와 우물가가 있는 시골 작은 마을에 살았다. 부모님은 맞벌이긴 하셨으나, 아빠가 농사를 지셔서 집에 아빠가 상주해 계시는 편이었다. 내 나이 10살, 초등학교 2학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시골에서 10월이면 마을 이웃간에 품앗이를 하며 추수를 막 마치는 때다. 우리도 아빠가 논과 밭을 일구고 계셨기 때문에 계절마다 밭에서 작물을 심고 캐고, 논에서 벼를 수확했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때는 빛 좋은 가을, 다들 추수하느라 바쁜 시기였다. 가을 햇빛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이고만 벼들이 빼곡한 황금들녁. 한집 두집, 돌아가며 추수를 하기 시작한다. 콤바인을 갖고 있는 집은 이 논, 저 논을 가로지르며 벼의 낟알을 털어내고 볏짚을 고이 뉘이며 다닌다. 우리집도 마을회관 어귀에 사시는 2층집 아저씨네 콤바인으로 벼를 다 베어냈다. 품앗이이기는 하나 기계를 썼기 때문에 품삯을 드려야 했나보다. 아빠는 빚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셨던 것 같다. 엄마 말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남한테 빚하나 지지 않고 손수 집을 지어가며, 아등바등 집을 짓고 우리를 낳아 키우셨다고 한다. 일을 마쳤으니 아빠는 빨리 정산을 하고 싶으셨나보다. 2층집 아저씨네로 품삯을 주러 가셨다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좁고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내려오시다가 발을 헛딛으셔서 뇌출혈이 생겼고 그 길로 우리를 등지고 떠나셨다.


10살에게 죽음이란 믿기지 않는 그냥 단순 헤프닝처럼 느껴졌다. 가족들이 울고, 아빠를 더이상 보지 못한다고 하고, 방 한켠에 누워 있는 아빠의 심장이 미동도 없는 걸보니 슬퍼서 엉엉 울었었다. 아빠의 관이 땅 속에 묻고 취토까지 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냥 아빠가 동네 아저씨들이랑 어디 놀러 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빠를 차가운 땅 속에 묻고, 기도를 하는데 옆에 있던 사촌언니가 물었다.


"너는 안 슬퍼? 왜 안 울어?"


너무 울어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걸까. 너무 믿기지 않아서 그랬던걸까. 시간이 20년이 훌쩍지나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허탈해서, 어이가 없어서, 믿기지 않아서 눈물이 나지 않았던 거 아닐까 싶다.


삼오제를 지냈던 날이었나, 아빠가 떠난지 3일 정도 됐던 날 꿈에 아빠가 나왔다. 실제로 아빠의 시신이 뉘여있던 모습이었는데, 아빠의 육체에서 아빠가 일어나 앉더니 "아빠 간다"는 한마디 남기고 내가 대답할 여지도 주지 않고 가셨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다른 가족들 꿈엔 나오지 않았는데 내 꿈에만 나온 걸 보면 아빠가 날 많이 사랑했나 보다.


내 인생에 있는 첫 죽음이었다.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지수 순위 중 5위권 내에 해당할 만큼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한창 자라날 나이에 아빠의 죽음이라니. 엄마는 아빠가 떠나고 난 뒤에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셨다. 나는 드러나는 변화는 없었지만, '불안'이라는 것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부모와의 애착, 가정의 안정감과 안락함을 느낄 나이에 '불안'을 몸 속 깊숙이 느끼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들이 보기에 밝고, 씩씩한 효녀로 잘 커 갔다. 하지만 매일 밤 9시만 되면 아빠랑 같이 끓여 먹던 라면이 생각나서 이불 속에 들어가 숨죽여 울고, 스쿨버스를 놓쳐서 학교를 못 가게 되면 아빠가 태워주던 오토바이가 생각나 울고, 아빠가 들고 다니던 성경책을 보면 아빠가 흥얼거리던 찬송가가 생각나서 울고, 나는 시시때때로 숨죽여 울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빠랑 보낸 시간을 곱씹고, 기억하려 애쓰다가 하나 깨달았다. 내가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기억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아빠 생일 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어버이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어 기억회로를 열심히 돌려봤지만 직접 내 목소리로 '아빠 사랑해' 라고 말한 기억이 하나 없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아빠를 사랑하지만 아빠는 내가 아빠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고 떠났을까 싶어 이불이 젖도록 울어재꼈다. 물론 엄마 몰래 밤을 적셨다.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기억이 없어서 꺼이꺼이 울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한테 '엄마 사랑해'라고 자연스레 말하는 아이가 되지 못했다.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타이밍만 재다가 목구멍에서 꺼내지 못하고 다시 삼키기만 하다가 중학생이 된 것 같다. 중학생이 되서도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나는 종종 진심을 담아서 엄마한테 편지를 남기곤 했다. 언젠가 엄마한테 안기며 '엄마 사랑해'라고 꼭 말해야지 라는 다짐만 하면서 말이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당연한 말을 새삼스럽게 하는 것이 어색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이라고 해도 가족들에게는 짜증과 화를 내는 날도 있을 것이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날도 있을 것이고, 싸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말 안해도 전달되는 사랑은 적어질 것이다. 말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당연히 알 수 있는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다. 다들 성적과 진학에 대해서 고민할 때, 나는 또 가족이 내 곁을 떠나면 어떡하나 고민했다. 어떻게해야 내가 가족들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에 대한 답은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대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때 전해야 후회가 남지 않겠구나 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됐다.


시간이 걸렸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한번 하고나니, 두번 세번은 쉬웠다. 내가 하다보니 가족들도 내게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나를 변화시켰고, 변한 내가 가족들을 변화시켰다.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아빠를 느낀다. 아빠를 생각한다. 그렇게 아빠는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아빠, 내가 너무 사랑했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남은 가족들에게 그 사랑을 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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