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인 이별이 내게 남겨주는 것들
모두들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서울에 내 집 하나 갖는 것이 꿈이라 최대한 아끼는 오늘을 살아가고, 또 다른이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위해 쉼 없이 계산을 하는 날들을 보내기도 하고, 어떤이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양보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저마다의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런 말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5)'
어릴적 나는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으려나', '내가 가진 돈으로 무슨 옷을 살 수 있을까' 등 지금 내 눈앞에 닥친 현실과 나에게만 집중하며 살았다. 웬만한 10대는 이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살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내가 죽고 사는 문제고,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가장 고난과 역경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때가 있었다. 내 나이 10살, 초등학교 3학년 가을 갑작스레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도 슬픈 것과 별개로 나의 고민은 온전히 '나'였다.
아빠를 떠나보낸 이후로도 6명의 가족들과 작별을 했다. 고작 내 나이 30에 죽음은 나이순이 아니라는 것을 세포 깊이 느꼈다. 20살이 되기 전부터 나는 나보다 가족에 마음을 쓰고, 우선하는 삶을 살았다. 내가 지금 뭘 먹고, 뭘 입고, 뭘 하기를 고민하기보다는 최대한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을지에 더 집중하며 살았다. 투잡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본가 현관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 줄 중문을 설치하고, 동생이 어디가서 기죽지 않고 마음 상처 받지 않게 갖고 싶은 걸 통 크게 사주는 누나를 택했다.
때로는 그들이 먼저 떠났다는 게 한스럽고 서러웠다. 그렇다고 이미 되돌릴 수 있는 시간도 아니지만 때때로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가듯 내 마음 속에 굳건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날들이 있었다. 기차나 비행기,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할 때면 왠지 모르게 떠난 그들이 떠오른다. 얼마 남지 않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들과의 기억이 보글보글 샘솟는다. 슬픈 마음에만 젖어있지 않으려고, 그들의 죽음에 의미를 찾아봤다. 그들이 떠나기 전과 후의 내 모습을 살펴보니 그들은 이 세상에 없지만 내 안에 그들이 있었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 행동에 그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과거의 한 때는 하나님이 날 등진 것만 같았고, 세상이 내가 행복한 꼴은 못 보는구나 싶었던 적도 있었다. 밤마다 짙은 우울감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그들이 남기고 간 의미를 되새기며 나 스스로를 바로 잡기에도 바쁜 시간이다. 게다가 남은 가족과 또 생긴 내 가족들과의 삶에 그 의미를 적용하며 살아 가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마음이 무너지는 어쩌다 하루가 있긴하다. 평범함과 일상의 행복이 무뎌져서 '나'에게 집중하며 또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 고민하는 날도 있다. 게다가 삶이 무감각해지는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마음을 다잡아주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죽음이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죽음인 셈이다.
사랑하는 이들 한명 한명을 다시금 기억하며,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한 기억까지도 최대한 끌어 모아서 그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나에게 남기고 간 의미를 글로 기록해두려 한다. 이 의미들은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삶이 무기력하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던가, 잠시 마음이 무너졌다거나 하는 이들에게 작은 터치가 되길 바란다. 물론 어느날은 스스로에게도 감각의 터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