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오늘] 나는 모델 워킹을 좋아한다
“뇌졸중이나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혈관 두께도 다 정상입니다.”
신경과 의사가 뇌 MRI 영상을 판독해 설명해주었다. 다 괜찮다니 안도하며 병원을 나섰다. 작년부터 걷다가 서너 번 고꾸라지듯 넘어지거나, 버스에 오르다 다리 힘이 풀려 맥 없이 주저앉곤 했다. 심지어 멀쩡하던 걸음걸이조차 뒤뚱거려지니 놀랄 밖에. 혈액검사 등 이런저런 검진으로는 이상 소견이 없어 마지막으로 택한 절차였다.
며칠 후 ‘인천 고령사회 대응센터’가 주최하는 <내 인생의 런웨이! 시니어모델 입문과정 2기 참가자 모집> 소식이 전해졌다. 망설임 없이 바로 신청했다. 모델 워킹을 잘할지 못할지를 따지기에 앞서 나는 곧게 걷고 싶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시니어모델 관련 기획을 지자체가 무료로 실시한다니 웬 떡이냐 싶었다.
모델 워킹
모델이 될 수 있는 기본은 워킹에 있다. 소위 ‘모델 워킹’은 곧은 일자 워킹이다. 몸의 중심이 잡혀야 가능하다. 나는 모두 함께하는 연습실에서 넘어질 듯 삐뚤빼뚤 걸었다. 볼썽사나울 건 처음부터 각오했지만, 보폭까지 넓혀야 하니 난제였다. 몸과 맘이 하나이고자 애쓰다가 왼발 힘줄에 염증이 생겨 몇 주간 정형외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비바람이 치던 지난 5월 11일, 집에서 10여 분 거리 병원까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강한 통증이 쓰나미가 되어 나를 뒤흔들었다.
물리치료 후 돌아오는 길에는 아예 우산을 접었다. 그리곤 한 땀 한 땀 수 놓듯 일자 워킹을 시도했다. 남이야 보든 말든 나는 절룩거리지 않고 걷고 싶었다. 2주 후에는 통증이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겨지더니 점차 몸의 균형이 잡혀갔다. 정형외과 원장님은 하이힐을 신고 모델 워킹을 하겠다는 나를 응원했다. 그 통과의례를 거치며, 모델 워킹이 근골에 선한 영향력을 끼침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파란 신호등이 켜진 도로선을 모델 워킹으로 밟으며 건너간다.
프로필 촬영
모델은 자기만의 콘티를 연출하며 워킹, 포즈, 표정 등이 어우러지게 연기해야 한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프로필 촬영이다. 카메라 셔터가 찰칵찰칵할 때마다 시니어 모델로서 연륜이 묻어나는 고유한 보디랭귀지를 순간순간 다양하게 선보여야 한다. 그런 예술가적 끼가 없는 나는 어리바리하게 우왕좌왕하다 앵글 밖으로 밀려났다. 연기 잘하는 유명 배우들이나 연예인들이 행했을 음지에서의 노력들이 새삼 짚어졌다.
디자이너의 의상을 홍보하는 모델에게 연기력은 필수조건이다. 디자이너의 의도를 헤아려 의상의 매력을 옳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의상과 하나된 연출이 관객에게 호감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매사 논리를 앞세우는 나는 그렇게 감성적으로 어필해야 하는 현장과의 유연한 조화가 부족하다. 시니어모델의 아름다움은 자기와의 싸움으로 다져진 내공이 연륜 쌓인 외면으로 자연스레 스며나오는 것일 터여서 나는 갈 길이 멀다.
팀워크
여러 소리가 들린다. 강사가 제시한 같은 콘티를 놓고 듣고 이해한 바가 서로 달라서다. 부득부득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경우, 파열음이 일며 팀워크에 균열이 생긴다. 삿대질은 아닐망정 큰소리로 지적질을 하며 팀원을 아프게 하는 경우도 있다. 런웨이는 저마다의 기량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팀워크가 융합돼야 성공할 수 있다. 팀원에 대한 배려와 겸허한 태도, 순발력 등 인성이 유독 강조되는 이유다.
신장 차이에 따라 보폭이 다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제까지 살아온 습성일 성품이 다르다,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콘티에 맞는 자비 의상을 준비할 때의 마음가짐과 구매력이 다르다 등 모두는 모두에게 다름투성이다. 도중에 하차를 선택한 몇몇에게 그 다름은 커다란 압박으로 작용했으리라. 언제 돌출할지 모를 다름에 대해 담담하려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있어야 한다.
런웨이에 서다
새벽 5시부터 헤어 메이크업이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인천시청 본관 로비에서 리허설을 2번 했다. 나는 잠깐 딴생각에 빠져 순서를 놓치기도 하고, 화장실을 지나쳐 가다 뒤에 오던 동기가 일깨워 줘 돌아서기도 했다. 청심환을 챙겨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대 의상을 세 번 갈아입어야 하는 어둡고 비좁은 공간은 느긋함을 자꾸 밀어냈다. 써니 복장을 위해 목에 둘렀던 장미 코사지 매듭이 풀리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포토] 인천시청 중앙홀 시니어 모델 패션쇼...제2인생 '다시, 설레임' 주제 < 사회 < 기사본문 - 인천뉴스 (incheonnews.com) 에서 발췌한 나의 <80’s 써니>와 <블랙&시크>
꿈 많았던 <80’s 써니>, 웅장한 <블랙&시크>, 우아한 <드레스> 등 세 가지 패션쇼 주제를 나는 차례로 연출했다. 비록 끌탕하던 순서는 틀리지 않았지만, 팀원과 열을 맞추거나 관객을 향한 시선 처리는 미흡했다. 특히 드레스 워킹 중에 떨어진 귀걸이를 찾아 움켜쥐느라, 비록 출발점에서 대기하는 중이었지만, 옥에 티가 될 손동작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피날레를 마치고 꽃다발을 받았을 때는 안도감에 맥이 풀렸다. 어쨌거나 무사히 해냈으니까.
초대장을 받은 지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잘 어울린다’와 ‘용기 있다’로. 나의 어떤 측면을 많이 보았는가에 따라 갈린 거다.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아예 에어컨 설치를 빼 버린 내 결정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듯. 수료식 이후 나 또한 자문한다. 진정 시니어모델이 되고픈가. 몸치에다가 연기력이 꽝이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보다 혼자 있는 게 좋고, 남을 의식하는 스트레스는 원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모델 워킹은 좋아한다.
100세 시대에 필요한 건 돈과 건강과 할 일이다. 요즘 내게 급선무는 건강이다. 근력을 키워 일상을 꿋꿋하게 이어가기다. 모델 워킹을 익히며 한 발로 서서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오후가 되면 무겁던 다리가 가벼워졌고, 엉덩이가 무거워 달릴 수 없었던 것도 개선되었다. 시니어모델로서 활동을 안 하더라도, 모델 워킹은 내 곁에 머물 수 있다. 내 삶의 런웨이는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