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어떻게 삶을 바꿨나(3)
그렇게 2019년 11월이 다가오고 저는 머리를 다시 깎고, 다시 군대를 갔어요. 다행히 이번엔 4주 훈련을 모두 마쳤죠. 건강상 중도 퇴소 당하지 않도록 잘 조절하면서요. 그렇게 요양병원에 공익근무요원으로 배치되고 난 뒤, 소위 말하는 갑질을 당해 저는 일상의 행복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불상사를 겪습니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요. 하하.
저는 당시 폐쇄공포와 광장공포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폐쇄된 상황이면 급격히 공황이 찾아왔어요. 물론 요양원 가서 알았지만요. 아무튼 공황장애로 인해 요양원 한가운데서 쓰러졌음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이전에 있던 공황이 심하게 커졌습니다. 본래 있던 공황과 간호사와 원장이 쓰러진 저를 보고 아무 대처도 해주지 않는 경험이 맞물려, 그 이후로 몇 개월간 밖에 나가려거든 약을 꼭 챙기고 다녔죠. 아니면 나가기 전에 먹거나요.
하지만 참 신기했던 건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던 성질이었어요. 그렇게 힘든데도 밖으로 나가려고 했어요. 아직도 2019년 12월 25일 전후를 기억하는데요. 공황이 악화되던 시기, 제 친구들과 함께 제 생일 축하 겸 저녁-당구-피시방으로 이어지는 신박한 루트를 타고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 기억이 나요. 컨디션은 좋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나갔죠.
이유를 찾아보건대 그건 당연히 재미 때문이었어요. 항상 꾸역꾸역 나갈 때에는 어떤 '코스'가 있었어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연남동에서 만난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기획 같은 게 있었죠. 경험의 레벨을 더 높인다고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튀김덮밥을 홍대입구역 쪽에서 먹고 좋아하는 카페까지 걸어가면 소화가 딱 맞게 돼요. 거기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되게 좋죠. 여름 같은 경우 걷는 걸이를 좀 줄이고 에어컨이 좋은 카페를 찾아가요.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가족과 몇 번 여행을 간다던가, 친구를 불러 봄의 벚꽃놀이를 보러 간다던가, 친구를 만나 경의선 숲길을 걷는다던가 하는 일들이 정말 많았어요. 거기엔 정말 무조건적으로 '코스'가 있었어요. 축제에는 무조건 콘셉트와 기획이 있듯이요. 매일매일 어떻게든 재밌으려고, 또 어떻게 나온 바깥인데 더 즐거우려고 정말 정말 애를 많이 썼어요.
물론 스케줄이 없거나 나가기 도저히 힘든 날에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떠올려보고,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정말 ‘의미’를 만드는 시간이었어요. '왜 나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무섭지?' '왜 나는 이렇게 무서워하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했어요.
왜 그랬냐고 답변하자면 '정말 살고 싶었다-'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그렇게 의미를 찾고, 스스로를 파헤치다가도 나갈 수 있는 날엔 거의 무조건 나갔어요. 축제를 즐기려고 노력했죠. 생각해 보면 책도 집에서 말고 거의 나가서 읽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게임도 많이 한 것 같아요. 물론 같이 많이 했어요. 할 수 있는 재미와 즐거움은 충만히 하되, 그렇지 않은 시간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스스로를 분석하고 스스로와 대화를 나눴어요.
물론 뽀로로처럼 노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순공’ 시간도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찍어보기도 했어요. 고3도 아닌데 눈만 뜨면 공부를 했죠. 아니 정확히는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약부작용으로 혈압은 터질 것 같아 죽겠는데,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간이 아까워서 정신분석책을 읽고 스스로를 이해해 보려고 몸부림치고, 새벽에 깨서 다시 약을 먹기도 하고, 다시 자고, 일어나서 에너지가 남으면 다시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9월인가 10월쯤, 전역 통보를 받게 됩니다. 병무청에서는 저를 복무 부적합으로 판단한 건지 남은 시간 동안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진행합니다. 이제 자유였을까요? 아니요. 저에게 이제 남은 건 약으로 인해 높아졌던 혈압( 당시 160 인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망가져버린 멘탈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그래도 지금 보면, 재미와 불안과의 정면승부에서 재미가 이긴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도 크게 자리했겠죠. 하지만 당시 저와 게임을 같이하고, 싸워주고, 꽃을 보러 가주고, 같이 책을 읽어준 사람들이 꽤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공황을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고 약을 먹으며 밖에 가서 ‘소소한 재미’를 찾은 그 순간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역 한복판, 홍대 입구 한복판 등 도시의 한가운데 서있으면 마치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기분과 같았거든요. 차라리 공포영화를 보는 게 나을 정도로요. 하지만 어떻게든 함께하는 재미, 콘텐츠의 재미를 경험하려고 했었어요. 무식하게. 살려고.
그렇게 병무청으로부터 고지를 받은 후, 저는 한의학에 의지하여 한 달여간 혈압을 낮추려고 노력합니다. 매일 같이 아침에 침을 맞았고, 저녁에는 걷기부터 러닝까지 운동 강도를 점점 늘려갔습니다. 그리고 몸이 괜찮아지자 한 달 동안 제주도에 내려가 휴식을 취합니다. 그 시간이 생각해 보면 편안했지만 재미가 있진 않았어요. 부모와의 불화로 인해 약간은 강제적으로 이동한 것이기도 했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한 적한 곳으로 가서 밤 8시만 돼도 불이 꺼지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게스트하우스들을 두드리며 파티에 참석했어야 했나- 싶기는 한데,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도약할 에너지가. 큰 비행기가 도약하려면 큰 활주로가 필요하듯, 저에게도 마음의 큰 활주로가 필요했나 봅니다.
잠깐 멈춰서 하이데거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제가 느낀 하이데거는 ‘죽음정도 통과해야 진짜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다’라는 느낌을 주는 철학자예요. 왜 요즘 ‘나찾기’가 되게 핫하잖아요. ‘자신다움’, ‘자기 취향’, ‘나다움’ 등등이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이데거가 떠올라요. 하이데거의 철학을 여기에 연결 짓자면 ‘죽음을 통과해야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라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요.
아무튼 하이데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다른 건 아니에요. 하이데거는 되게 고독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저는 이를 ‘어차피 뒤질 땐 혼자’라는 뉘앙스로 이해하곤 했어요. 그럴 만도 한 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공포는 혼자 겪는 거긴 하거든요. 저는 이걸 좀 더 진실하게 마주하고 싶어 했나 봐요. 그래서 연남동에 집을 구합니다. 빚을 지고.
정말 운이 좋게도 1000/50, 9평 원룸을 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차마 홍대의 클럽이나 술집들을 전전할 용기나 에너지, 체력, 정신상태가 되진 못했어요. 그렇지만 혼자 고민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는 있었죠. 연남동은 자기 공간, 자기 취향등을 발견하기 매우 좋았어요. 강과 (인공이긴 하지만) 작은 숲을 끼고 있었고, 각자의 취향이 돋보이는 카페와 서점들이 있었습니다. 동네의 콘셉트가 밤과 낮이 달라 각각 경험할 수 있었고요.
당연히 빚을 지고, 당연히 리스크가 있었지만 삶의 큼지막한 자기만의 재미를 찾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취향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았어요. 삶의 원동력 중 하나인 러닝 그리고 노을의 멋짐을 발견한 것도 이때예요. 스스로 재활하기 위해 러닝의 거리를 늘리고 늘려 약 15km 정도까지 러닝의 거리를 늘리기도 했어요. 15km를 뛰며 각양각색 색깔이 달라지는 하늘빛의 매력을 느낀 것도 그쯤이거든요.
그렇게 8개월을 지냈어요. 일상을 축제로 만들며 조금씩 살만한 희망이 생겼던 것 같아요. 또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했어요. 당시 밥을 먹으면 혈압이 급박하게 올라 정신을 못 차리는 정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제 삶과 줄다리기를 어느 정도 끝냈으니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족쇄 같던 병무청과의 씨름도 끝냈겠다. 조금씩 약도 줄여나가고 있겠다. 미래를 생각해야 했죠. 그래서 처음 준비한 게 바로 신춘문예였습니다. 물론 힘도 못쓰고 바로 탈락했죠. 출판도 준비했습니다. 역시 바로 탈락. 그래서 철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려고 했습니다만 이건 양심상의 이유로 포기했어요. 어느새 모두를 위해 만든 철학이란 학문을 저만을 위해 공부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집으로 돌아가게 돼요. 돈은 돈대로 떨어졌고, 대학원이라는 다음 스탭도 엉겼으니까요.
이때부터 재미의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물론 자기 취향도 감도 높게 알게 되고, 여행 기획도 꽤 잘 짜는 사람이 됐어요. 2021년 10월, 연남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때 고등학교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 여행 기획을 모두 제가 했던 것 같아요. 그 바로 다음 주, 친구와 제주도를 다시 갈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군가 여행을 갈 때 저에게 묻는 일들도 늘어나게 됐습니다. 저도 썩 재밌었고, 그들도 저를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내게 맞는 재미와 축제의 양식이 생긴 거죠.
집에 돌아와서는 취업에 전념합니다. 뜬금없이 시작한 건 바로 코딩이었어요. 정말 하루에 8시간씩 코딩을 했어요. 사람들에 관해 관심이 많다는 걸 이미 스스로 알고 있던 저는 먹고살기 위해 국비지원 코스를 알아보던 중 ‘데이터분석’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오게 됐죠. 사람들의 행동군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밑도 끝도 없이 (통계의 통자도 모르는 상황에서) 데이터분석 공부를 시작하게 되죠.
물론 처참하게 발렸습니다. 취업시장에서요. 약 4개월 정도 준비를 했었는데 준비가 미흡했어요. 사람들도 해당직군으로 많이 몰렸던 상황이기도 했고, 애초에 비전공자가 통계학 전공자들을 이기기는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공황도 한몫을 한 것 같아요. 공황은 아쉽게도 길고 오랜 사고를 방해하더라고요. 그 와중에 2020년부터 제 일상의 축제를 소소하게, 하지만 길게 이어가주던 친구와 4개월을 싸운 끝에 각자의 길을 가게 되고 나니 에너지가 쭉 빠지는 느낌이었죠.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면 역시… 저는 ‘재미’가 중요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재미가 없으면 하기가 싫었어요. 뭐랄까. 솔직히 2021년쯤부터는 재미가 좀 바닥을 기더라도 엄청 ‘살기 싫다’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재미보단 의미 쪽으로 충분히 에너지를 돌려도 되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기 싫다’는 여전히 유효했는지 머리가 아파도 재미가 있으면 했어요. 몇 년 전에 배웠던 미적분을 다시 상기시키고, 불안을 무릅쓰고 코드를 다시 치고(저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코드를 잘 못쓸까 봐 불안감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다시 데이터 분석의 정확도를 높이고 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참 많이 느끼더라고요.
그렇지만 역시 ‘일’의 재미로는 부족했어요. 부활시켜야 했습니다. 인생이 노잼이 돼버리면 저는 매우 힘든 사람이었거든요. 간간히 가는 산책이나 서울로 짧게 가는 탐방등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물론 여행을 갈 수는 더더욱 없었고요. 아니 정확히는 이곳저곳 갈 돈이 없었어요. 심지어는 집 근처에 카페도 많지 않을뿐더러, 돈도 많지 않아 걸어서 몇 십 분을 가거나 버스를 타고 가서 카페를 가야 할 지경이었죠. 자기 취향, 자기 여행 스타일, 어떤 유형의 재미 등이 모두 만들어져 있는데 재미없는 일을 해야 한다니. 정말 최악이었어요.
물론 이 노잼과 예스잼의 시기를 거친 게 지금의 저에게 큰 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때 얻은 거라고 한다면 ‘나는 일을 재미있게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일은 직장인이 된 지금도 재미없지만 그럼에도 일 속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감각은 그때 취업준비를 하면서 찾은 것 같기도 해요.
당시 배운 데이터분석을 현재 현장에서 간간히 써먹기도 하지만 그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찾은 게 있다면 아마 ‘일에 대한 감각’ 같아요. 결국 데이터분석으로 취직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그 시간이 떠버린 시간이 돼버렸지만 '일 속에서 재미를 찾아야 한다'는 확신과 그 감각은 확실히 배운 것 같아요. 하긴 야 제가 취업할 때까지 5개 이상의 찍먹을 해봤거든요. 백엔드개발자, 데이터분석 개발자, MD, 마케터, CS팀 등등 그래서 안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할 때 재미있는지. 하지만 당시 저는 성에 차지 않았죠. 그래서 꺼진 재미를 부활시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에게 문자가 옵니다. “근데 6월 6일에 뭐 해? 대전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