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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Oct 10. 2024

어떤 재미는 희망을 품고 있다.

재미는 어떻게 삶을 바꿨나(2)

어떤 재미는 희망을 품고 있다.


힘든 시절 번개처럼 쓰게 된, 그게 바로 “내 장례식장에선 치킨파티를 열기로 했다”라는 글이었어요. 정확히는 힘들 때마다, 죽고 싶을 때마다 ‘꼭 내 장례식장에 와. 유서에 치킨파티를 써놓을 테니까’ 하던 너스레가 글이 된 케이스였죠. 생각해 보면 이 문구와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꽤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s://brunch.co.kr/@lmjhy1226/131


무언가를 이겨내려면 분명 ‘희망’이 필요하다고 믿는 편이에요. 하지만 때때로 희망 속에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미 속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희망은 방향을 쥐어주지만 재미는 현실을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평소의 답답함을 게임으로 곧장 풀어내면 후련하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도, 좋아하는 팀을 한 바탕 응원하면 응어리가 풀려 다시 일할 힘이 생기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딱딱하고 이상적인 언어들은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만들어요. 업무를 잘해 능력자가 되겠다는 희망도, 언젠가 꼭 집을 사고 말 거야!라는 다짐도, 돈 열심히 모아서 언젠가 놀고먹어야지! 하는 미래도 종종 우리를 지치게 해요.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재미는 우리를 이상으로 이끄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에서 치킨파티를 열고 싶어-‘라는 말로도 살 힘을 얻는 것처럼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를 분석하고, 과거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일들은 아프고 힘들었어요. 그러나 일상에서 축제와 같은 기억들이 저를 계속 살려놓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황장애로 심박수가 150 BPM이 넘어가 응급실로 실려가던 그때도, 가끔의 죽음충동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죽음을 시도하던 그때도, 자기 자신에게 참 많이 그런 이야기를 해줬던 것 같아요. “아- 언젠가 이렇게 다시 행복하게 놀 수 있어. 언젠가 이런 시간이 찾아올 수 있어” 


그때 제가 집중했던 건 ‘고통에서의 해방’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는 ‘고통이 있더라도 이렇게 재밌으면 버틸 수 있어’라는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재미의 유형이 조금 다르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에는 유달리 밥을 맛있게 먹었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던 해석이나 전쟁영화에 가끔 나오는 총알 체스, 고양이를 보고 행복해하는 병사들의 모습, 세계 1차 대전 중 1914년 당시 영국군과 독일 병사들이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긴 모습까지 사실은 고통을 이기는 건 소소한 행복들이었을지도 몰라요. 물론 희망과 의미도 중요하지만 고통을 이겨내고 희망으로 향하는 눈앞의 현실적인 행복들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주 작은 축구의 힘


이제 제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2019년 5월 초. 저는 국가의 부름을 갑작스레 받아 훈련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제 인생계획엔 없었는데 급작스레 4월 초에 영장이 날아왔죠. 당시 저는 일본 유학준비로 한창이었는데 어느 날 우편함에 영장이 꽂혔으니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느낌과 비슷했어요,. 제가 세웠던 기획과 생각들이 무너짐과 함께, 공황도 약간 있던 터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위로가 됐던 게 바로 교회에서 했던 축구였어요. 사실 축구도 아니고, 운동장 한편에 굴러다니는 간이 골대 두 개를 세운 다음, 그날 모인 사람들끼리 공을 차고 놀았어요, 그건 사실 그냥 공놀이었어요. 어떤 정식적인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고, 그냥 공하나로 웃었던 그런 그냥저냥 한 공놀이였어요. 한 8명이서 했었나 그랬을 거예요. 봄볕이 그리 따갑지는 않던 봄날, 골을 한 두 골인가 넣었는데 그때 모인 계기는 “00이 축구 송별회” 였죠.


사실 저도 알았어요. 송별회를 핑계 삼아 그저 축구(가 아닌 공놀이)를 하고 싶어서 모였다는 걸. 하지만 이상하게 그때 그 놀이가 위로가 됐어요. 수많은 경기를 했지만 그때 넣었던 골이 되게 기억이 남아요. 그때 엄청 잘한 것도 아니고, 뛰어나지도 않았어요. 처음 모였을 때 심지어 간이 골대도 남지 않아, 가방 두 개로 각각 골대를 만들어 축구를 했는데 가방에 맞고 골이 들어간 기억이 생생해요. 정말 재밌는, 나름대로 중요한 경기들과 골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그 골이 기억에 남아요. 참으로 이상하죠. 그런 골이 기억에 남는다는 게.


생각해 보면 그때 못하는 사람들끼리 난장판으로 웃으면서 게임을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누가 넣든, 누가 막든, 스코어도 세지 않은 채 소위 말하던 ‘행복축구’라는 걸 했어요. 그래요. 생각해 보면 그저 다들 웃으려고 왔던 것 같아요. 저의 송별회에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목적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렇지만 그때 같이 웃었던 시간과 즐거웠던 순간들이 많은 긴장을 풀어주고, 동시에 위로로 남았던 것 같아요. ‘아- 또 잘 버티고 오면 이런 거 할 수 있구나’ 싶어서요.


비록 저는 8일쯤 만에 훈련소에서 퇴소하여 다시 훈련소를 가는 레전드 썰을 만들고 왔지만 어쩌면 그때 기억으로 꾸준히 풋살을 해오고 있는지도 몰라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요. 뿐만 아니라 그게 좋아서 교회에서의 행사를 할 때 사진으로 잘 남기려고 했던 것 같고요. 만약 교회가 전도에 힘을 많이 줬거나 복을 바랐다면 이런 기억이 없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아쉽… 게도 당시 청년부를 맡았던 목회자가 노는데 진심이었던 목회자라(유튜브 카더정원의 ‘제2회 보드게임 동호회’ 영상을 보시면 어떤 분이신지 대략 감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저에겐 위로와 해방의 시간이 되었어요. 교회가 안전하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일상을 소소한 축제로 바꾸면 어떨까?


왜 사람마다 책은 읽었는데 제목과 느낌만 기억나는 책이 있잖아요. 저에게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책이 그런 책이었어요. 파리여행 간다고 사서 읽었던 책인데, 거기엔 헤밍웨이가 날마다 파리를 축제로 즐겼던 기록들이 있어요. 헤밍웨이가 경 마도 하고, 서점도 다니면서 파리에서 즐거운 콘텐츠도 즐긴 걸로 기억하는데, 저에겐 다른 내용은 안 남았고 다만 그저 매일매일 축제처럼 살려고 이것저것 찾아다녔구나 -싶은 감각만 남아있어요.


처음 훈련소를 퇴소했던 날은 외삼촌의 장례가 진행되는 날이기도 했어요.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시던 외삼촌의 죽음이 저에게는 심적으로 꽤 슬픈 일이었는데, 심지어는 8일 정도 있다가 훈련소를 퇴소해 버리니 제 계획도 다시 엉망진창이 돼버린 거예요. 뿐만 아니라 저는 기약도 없이 재 입대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기간이 최소 6개월 뒤라는 것 역시 퇴소를 하며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정말 큰일 났다 싶었어요. 재검사비, 진료기록확인비를 포함하여 대부분 많은 부담이 저에게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약 없이 재입대를 기다려야 했으므로 미래에 대한 기획도 고사하고 아르바이트나 정규직 취직도 어려울게 뻔했으니까요.


제정신장애가 악화된 것이 2019년 겨울-2020년 봄이었으니 미래에 닥쳐올 힘든 상황까지 나름대로 숨 쉴만한 여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냥 행복하다거나, 여유가 있다고 자부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일단 공황장애가 어느 정도 있었고, 미래 역시 그리 쾌활하게 열려 있지는 않았고, 평소 느낌도 좋았는가-하면 그렇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거기서 저는 살 궁리를 시작하고 있었으니 일상의 재미에 꽤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어요.


당시 2019년 겨울 전까지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벤트들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아요. 마치 몇십 년 전의 파리에 살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그때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 상황을 타계할 즐거움들을 발굴하기 시작합니다. 벌라는 돈은 안 벌고, 눈앞에 있는 재미들을 찾아 나선 게 꽤 즉흥적이기도, 무계획적이기도 했지만 당시를 생각해 보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아니, 오히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아니면 못 놀아!’하고 스스로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즐기기로 마음먹고 난 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같이 살던 친구들이었어요. 본래 군대를 가기 전 같이 살던 친구들이 있었는데요. 다시 돌아와 같이 살던 친구들과는 그렇게 보드게임을 많이 했어요. 그때 당시 4-5명 정도가 큰 집을 빌려 같이 살고 있었는데요. 허다한 날이면 보드게임을 하거나, 허다한 날이면 같이 밤마다 피시방에 가곤 했어요. 보드게임을 하고 피시방을 갔다가 야식을 먹고 떠들다 자는, 그렇게 눈을 잠시 붙였다가 뜨면 다시 다음 날이 되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다음날, 아침 수업이었던 친구들은 고생을 좀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 루틴은 완벽한 코스가 됐죠.


여행도 참 많이 추진했어요. 같이 살던 친구 한 녀석의 입대여행을 같이 가는 한 편, 그 친구의 입대를 챙겨주고는 해변에서 놀거나 주변 맛집들을 돌아다녔어요. 그동안 여행을 곧잘 다녔던 경험으로 가장 재밌는 코스를 짜면서도, 물놀이를 역시 빼먹지 않았죠. 드라이브와 폭죽놀이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훈련소에서 쫓겨났음에도요.


9월에는 하늘공원에 갈대가 피니 하늘공원에 어떻게든 친구들을 모아 가기도 했어요. 항상 9월만 되면 같이 하늘공원을 가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어떻게든 그 친구들을 꼬셔 하늘공원을 다시 갔습니다. 그렇게 그 빈시간들을 소중하게 조금씩 채웠어요. 물론 미래에 대한 막막함과 본래 존재했던 공황, 우울감을 어느 정도 해석하려고 책을 읽고 공부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중요한 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라는 점이었던 것 같아요. 절실할 정도로 기도만 하거나 타인에게 매달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좋은 숙소에서 물놀이하고 노는, 수련회를 가장한 교회 MT에 참석하고 혼자 서촌에 가고, 전시회를 갔죠. 


그렇게 일상을 천천히 축제처럼 만들기 시작했어요. 밖으로도 많이 쏘아 다녔습니다. 처음 서울에서 자취를 했을 때 스스로 세운 프로젝트인 “서울 탐방 프로젝트”가 도움이 됐어요. 일주일에 한 번, 서울의 다양한 지역을 가보자고 마음먹었던 프로젝트를 통해 머릿속에 경험치가 조금 모였는데, 그걸 써먹기 시작한 거죠. 조금이라도 우울하거나 힘들면 노트북과 책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갔어요. 친구들을 만나 놀 수 있으면 더욱 좋았고요. 그때 보면 카페에서 책피고 사진 찍고 글 쓰는 게 청승 떠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보니까 청승이 아니었어요. 매일매일의 관찰, 매일매일 새로운 것들, 새로운 환경을 보고 싶었던 거였죠. 어떻게든.


그렇게 저는 소소한 축제가 쌓여갔어요. 저만의 재미를 찾았던 거죠. 물론 상업적인 워터밤이라던가, 록페스티벌, 클럽 등 일상을 축제로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겠지만 저는 일단 돈이 없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교회 친구들과 같이 사는 친구들이라는 축제를 즐길 좋은 동료들도 있었죠. 조그맣게라도 기획을 짰어요. 어떻게 하면 같이 자취하는  친구들과 재밌게 놀 수 있을지를요. 교회사람들과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떻게 하면 같이 놀 수 있을지를요. 그래도 살아보자-라는 희망과 불안, 우울, 공황등의 아슬아슬한 씨름 속에서 이제 저는 훈련소에 다시 가게 됩니다. 11월 21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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