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어떻게 삶을 바꿨나(10)
하지만 혼자 재밌으면 한계가 좀 있더라고요. 제 재미의 지속성은 여러 사람과 함께 할 때 오래갔어요. 하지만 6400km를 수영해 온 펭귄은 아쉽게도 저밖에 없었죠. 물론 여기서 저는 ‘그동안의 철학과 관찰 그리고 깨달음을 활용해 엄청난 기획을 탄생시켜 냅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드디어 제주도에서의 깨달음과 즐거움이 팡하고 터져서- 엄청난 걸 만든다고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제주도에서 그럴싸한, 여러분을 현혹할만한 ‘철학덕후 아싸였던 내가 회사 내 인싸가 되게 만들어준 3가지’ 같은 건 없었어요. 오히려 통찰이나 깨달음은 책을 읽으면서, 혼자 생각하면서, 사람에 대해 고민하면서 얻었지 제주에서 얻은 경험은 ‘요즘 것들은 말이야… 재미에 진심이 아니네 쯧쯧쯧’ 하는 꼰대 기질이라면 꼰대기질이었죠. 오히려 좀 허무하게도 제주도에서 얻은 건 어느 정도의 자신감, 그리고 눈앞의 재미에 대해 열린 태도 같았어요.
다만 다른 사람에게 ‘이거 하실래요?’하고 제안하는 모습이 늘어난 건 놀랐어요. 제주를 다녀오자마자 몇 가지 모임이 저를 중심으로 급작스레 만들어졌습니다. 아, 깊은 고민이나 기획으로 시작한 건 아니고, 그냥 ‘다들 이거 하면 재밌어하겠다-‘ 싶은 아이디어들이 떠올랐어요. 그러면 저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쓱 가서 의사를 확인했고 모임을 추진했습니다. 물론 거절에 대한 불안도 약간은 있었지만 ‘다들 재밌어하겠는데?’ 그리고 ‘부수적인 좋은 점들이 많겠는데?’ 싶은 두 가지 조건만 맞으면 바로 가서 쑥 하고 ‘같이하실래요?’ 하고 던졌습니다.
신기했던 건 이전에 망했던 책모임과 방법이 정말 달랐던 점이에요. 이전에는 혼자 열심히 고민하고, 혼자 재밌어하는 걸 생각해서 제안했었어요. 물론 ‘책모임 하실래요?’라고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미 ‘책모임의’의 ‘ㅊ’ 자만 꺼내도 다들 ‘해보고 싶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한 게 책은(특히 제가 제안하려고 빌드업을 쌓던 책모임은) 무겁고, 재미없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책들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제안한 모임들은 에너지가 좀 들어도 재미가 있었어요. 큰 목표와 이해를 향해가지 않아도 됐고요. 퇴근 후 회사 근처 맛집들을 하나하나 뽀개보는 모임 ‘화요미식회’, 서로 비난하거나 욕하는 게 아니라 진정 즐겜을 목표로 하는 ‘축구동아리’, 2023년 겨울을 지나며 살짝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던 ‘한강피크닉’등이 그랬습니다.
참으로 신기했던 건 이전에는 ‘깊이 고민하여 무거운 기획’, 그러니까 며칠을 고민하여 ’ 00 책모임’ 같은 어젠다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거기엔 높은 이상이나 딱딱함, 진지함들이 담겼던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사내 문화와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이득이 좀 있겠다 싶으면 바로바로 즐길 수 있는 즐거움들, 기획들을 휙휙 던졌어요. 같이 한강 갈 사람을 구해 점심시간에 한강으로 나들이를 가는 한 편, 맛집에 진심인 사람들을 모아 업무가 끝난 뒤 ‘화요미식회’ 동아리를 만들었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아 풋살동아리를 만들어 계속해서 유지시켜 나갔습니다. 어쨌든 ‘재미’ 자체가 목적이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축구 모임을 시작합니다. ’답답함 속에서 나를 즐겁게 만든 것도 축구이며, 나를 절망 속에서 끌어올린 것도 축구였다-‘ 와 같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저 재미를 위해서요. 당장 눈앞에 재미였습니다. 은근슬쩍 수요조사를 해보니 최소 6명은 할 것 같았어요. ‘일단 예약해 보자!’라는 모바일 팀장님의 제안에 일단은 총대를 메고 바로 주변 구장을 예약해 버렸습니다. 처음이었어요.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고 무언가를 시작한 경험이요.
물론 하면 꽤 큰 이득들이 있을 것 같았어요. 개발팀 내 소통도 많아지고, 많은 이들이 활기롭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도 그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요. 분명 경험상, 힘들 때 힘도 얻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힘들 때 힘을 얻기 위해 축구를 한다!’와 같은 거시적 목표를 잡지 않았어요. 그냥, 재밌을 것 같으니까. 더 정확히는 ‘함께 재밌을 것 같으니까 하자’가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이유 없이요.
돌이켜보건대 그 시작점은 사실 제 안의 재미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매주마다 강박적으로 하던 ‘그 깟 공놀이’. 그래도 사람이 먹고살려면 이건 해야지- 하고 찍은 네이버 지도에 찍은 별표들. 그래도 가까운 데 가서 바람 쐬면 기분도 좋아진다-는 걸 좋아해 제안한 한강 피크닉등 제 안에 간간히 쌓여가며 저 스스로 재밌게 놀았던 것들이었죠.
더 멀리 가기 위해, 더 재밌기 위해 저는 이 재미들로 연결되고 싶었습니다. 초대한다거나, 제가 깃발을 꽂았다거나, 제가 중심이라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어요. 물론 시작이야 제가 시작했지만 다들 참여해 주며 저도, 그들도 재밌게 그리고 오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023년 10월 19일 첫 번째 매치가 진행됐습니다.
처음 제가 이야기했던 그냥저냥 한 공놀이를 기억하시나요? 군대 가기 전 했던, 그 오래가던 공놀이 말이에요. 당시 그 공놀이는 저 혼자만을 살렸지만 이번 공놀이는 모두의 재미를 살렸던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회상하는 회사의 첫 모습은 이렇습니다. 웹 서비스 오픈 한 달 차. 많은 업무로 모두 약간 지친 표정. 회사 내 동력이 없는 것 같음. 뭐랄까. 스타트업이라 그럴 수 있지-라는 약간은 수용하는 느낌이 강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게 조금 쓸쓸해 보이더라고요. 약간의 의무감으로 다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재미보다는 열정, 주어진 일들에 대해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고민합니다. 재미와 성과,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요.
제가 입사하자마자 들었던 질문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저 사람들, 서로 인사는 할까?”라는 질문이 어느새 스쳐갔어요. 제가 조금 과장해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만 당시 개발팀은 정말 조용했어요. 인사는 할까- 할 만큼 의문이 들정도로요.
그러므로 저 혼자 재밌기란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다들 일에 버거워하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얼굴피고 있기란 쉽지 않을 노릇이었습니다. 또한 혼자 데이터를 짬짬이 들여다보면서 계속해서 즐거워할 노릇도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인디언식 기우제로 계속해서 혼자 노력을 할만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스타트업 특성상, ‘개발자들의 분위기들을 개선하기 위해 무한정 자원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는’ 기우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돌려보니 “사내 문화 유치를 통해 성과를 낸다”라는 건 저 말고 수많은 조직들이 고민하던 문제었거든요. 그러던 중 떠오른 게 바로 축구였습니다. 같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다들 즐거울 수 있었어요.‘재미와 업무 모두를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수’ 이자, 미련하게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도 되지 않아도 되는 수. 그 딱 하나의 수가 바로 축구였습니다.
그래서 딱 봐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꼬드겼습니다. 그리고 근처 구장으로 예약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2023년 10월 19일 FC원더월의 첫 매치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축구는 ‘몸으로 하는 스포츠’라는 점이었죠.
학창 시절에도, 크고 난 이후에도 축구를 한 게임하면 의가 상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 서로 토라지고 말 한마디 안 했습니다. 축구는 ‘축구할래?’ 말 한마디로 친해질 수 있었지만 볼 한 번 잘못 찼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토라질 수 있는 스포츠였죠. 무엇보다 업무상에서는 젠틀하지만 축구하면서는 과격하게 돌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기도 해서 그런지 마음을 졸였습니다.
심지어 첫 경기 때 참여자들은 단순 개발팀뿐만 아니라 프로덕트팀, 그로스팀, 재무팀등 많은 곳에서 모인 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라도 난다면 정말 본래 의도와는 너무나도 멀리 가는… 서로 싸워서 말도 안 하면 이슈가 많이 나오는 건 고사하고 각 팀의 분위기를 풀어줘야 하는 리스크도 존재했습니다. 재미는 고사하고 회사에 오는 게 불편한 사람들도 생길 수도 있었고요.제 의도와는 정말 멀리 가는 일이었습니다.
재무팀, 전략팀, 모바일팀, 서비스기획팀 등 각 팀에서 함께 축구(풋살)를 진행했어요.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매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정말 성공적이었던 건 어느 정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느샌가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 친해지고, 다들 말을 걸고 웃고 있었어요. 물론 저도요.
실제로 테스트와 운영을 맡고 있던 저는 좀 더 편하게 개발자분들을 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개발 자도 서로 소통이 늘어났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성과로도 연결됐습니다. 애초에 서로 소통하면서 이슈들도 줄어들었을뿐더러,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니 사전에 문제들을 잡아 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멀리 그리고 같이 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저와 축구를 했던 동아리 분들은 약 1년간 아무도 퇴사하지 않았어요. 언제 하냐고 장난스레 저에게 투정을 부린 분들도 많았습니다. 축구 때문에 회사를 다닌다고 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었고요. 함께 하는 재미는 지속성을 이끌어냈습니다.
축구로 바꾼 문화가 업무적인 성과로 이어진다는, 그러므로 “여러분. 사내 문화를 바꾸세요!”라는 주장을 펼치거나 “사내 성과를 올리는 세 가지”와 같은 글을 써도 됐습니다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재미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재미는 성과이상의 가치였습니다. 재미는 살아갈 그리고 같이 일할 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