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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Jul 22. 2023

사랑에 관한 에세이 2 - 다정함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뭘까. 편안한. 뭘 추가로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이 말을 하면 그대로 전달될까 하는 초조함이 없는.  언제나 거기에 그대로 있는. 거기에 없더라도 걱정되지 않고 돌아올 것을 아는. 낮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이 있는. 오렌지색 조명. 창문 밖으로 흘러나가는 따뜻한 불빛. 도란도란. 농담과 킬킬댐. 아침이 와서 따로 떨어져야 될 때의 찰나의 아쉬움과 삶으로 번져나가는 용기. 

 

나의 두 번째 사랑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첫번째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너무 많이 다쳐서, 나는 그 따뜻함이 너무 좋았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을 해두고 싱크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나는 너무 좋아했다. 지금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첫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을 때 나는 선물을 열개쯤은 받았던 것 같다. 작은 것들. 실내화, 귀여운 아이스크림 모양 포스트잇 그런 것들을 모두 따로 작게 포장해서 받았다. 내가 뭘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별 것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감정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과 오래 접촉하고 나면 흔적이 남는다. 시간을 보내는 법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보고 베낄 수 있는 관찰의 결과다. 첫사랑은 아주 오래 나를 혼자 내버려두었고 나의 내면아이는 차가운 동굴 속에서 혼자 추운 시간을 견뎌내는 법을 성공적으로 배웠다. 첫사랑에게서 옮아온 나의 습관때문에, 닫힌 문에다 대고 열어달라고 계속 두드리던 두번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틴더라는 데이팅앱을 통해 그를 만났다. 틴더가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던 시절이었다. 처음 생겼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 드디어 한국 남자를 안 만나는게 이렇게도 쉬워졌어 난 자유야! - 마음도 어느정도 꺾이고, 이상한 섹스와 무례한 남자와의 훅업에 질려가던 차에 다정한 에릭을 만났다. 10월 언젠가 망원역 앞 횡단보도에서 처음 만난 날, 그 사람의 갈색 눈썹에 아름답게 반짝이던 가을 햇빛. 햄버거와 만화방. 전철역으로 뛰어 들어가기 전 첫 키스. 

 

우리는 빠르게 동거를 시작했다. 3개월이 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뭐 어떠랴는 심정이었다. 그 사람은 다정했고, 나는 미래에 대해 별 진지한 생각을 해본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랬으니까 3개월쯤 지나자 삐그덕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기억하는 것은, 내가 가던 클라이밍 짐에 내가 가는 이유가, 친구인 ㅎ를 몰래 좋아하고 있어서가 아니냐고 추궁하던 장면이다. 정말 그렇지 않았기에 아니라고 했지만 그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원래 너무 얼토당토 않은 공격을 받으면 말을 잃는 법이다. 그런데 아마 그가 듣고 싶던 말은 그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말도 안되는 추궁은 사실 나만을 배타적으로, 특별하게 사랑해달라는 절박한 요청이라는 걸 그 때의 나는 몰랐다. 그냥 그가 추궁하는 것을 논박하다가 나는 그의 비논리성에 질려버렸고 실망했고 지쳤고, 이것이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종결되길 바라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다른 것들을 했다. 거진 1년이 되는 시간 동안 또 혼자서. 또 외로워졌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과 있었는데도. 

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사람이 진짜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산책을 나가자고 하면 그 날의 체력에 따라 나가거나, 혹은 오늘은 나가기 싫다고 대답했다. 이사를 가자고 하면 왜 그 동네로 가기 싫은지 조목조목 대답했다. 소리는 들리지만 마음은 없는 말을 들으면서 그 사람은 꿈쩍도 않는 나를 어떻게든 움직여보고 싶었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말들을 내뱉었다. 어떻게까지 하면 지렁이가 죽나 찔러보는 아이처럼. 나는 어리둥절해 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는지 왜 저 사람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차원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나에게는 다행히도 첫사랑에게서 배운 무감각이라는 갑옷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함에 그 무적같은 쓸모에 매번 감사하고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내가 생각하던 연인간의 사랑이란, 해야 마땅할 일을 하고, 서로의 바운더리를 지켜 예의있게 상처주지 않는 것, 그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우리 가족에게서 배웠던 것, 그리고 첫사랑에게서 반복했던 것이었다. 익숙해서 끔찍하도록 당연했던, 바위같은 믿음.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또 괴로웠다. 왜 내인생은 이렇게 힘들까? 왜 나는 이런 연애를 하게 될까? 싸우는 것이 극도로 지겨웠다. 그런 멈춘 것 같은 시간이 1년쯤 지나고, 내가 그 사람에게 해줬던 유일하게 기억나는 일은 베란다의 한 코너를 작은 테이블과 낚시의자로 꾸며진 일이었다. 아마 그 사람이 나에게서 기억하는 다정한 모습이 있다면 아마 그것일 것이다. 그 외에는, 있었을까?

 

나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고, 그 사실이 결국 그 사람을 떠나게 만들었다.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사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아이는 그 사람에게도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것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그게 그 사람을 떠나게 할 수 있어서 마음 한 켠을 쓸어내린 것도 솔직한 마음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관계에서의 나는 한 때 불같았던 연인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동적이었다. 어떠한 이유로도 나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첫 연인과 그렇게 오래 만났어도 수많은 복제적인 데이트들 말고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연인사이에서 뭘 해야할 지 몰랐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만 봤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도 못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는 법도 몰랐고, 그 사람과 잘 될지 안 될지 판단하는 법도, 보내주는 법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보다 그 사람이 나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엔 그 사람은 아마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의 다정함은, 몇년이 지나 내가 너무 힘든 상황이 되어서야 나를 강하게 쳤다. 헤어지고도 에릭은 다정했다. 가족여행을 간 긴 시간동안 고양이를 봐주고, 가끔 이제는 돈을 많이 번다며 밥을 사주고 커피를 사주고 산책을 했다. 다시 자기랑 사귀지 않겠냐고 귀엽게 굴던 실없는 농담이 이민을 혼자 결정하고 불안해하던 나의 그 시절을 위로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함께 살면서 만들던 길고양이용 스티로폼 박스집을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혼자서도 만들었고, 고양이를 구조해서 함께 살다가 떠날 때 미국으로 두 마리 모두 데려갔다. 몇 년 후 이 사람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다시 시작할 수 없냐고 물어봤었는데, 그냥 짧은 작별 키스만 하고 미련없이 떠나갔다. 원래 다 준 사람은, 그리고 혼자 극복한 사람은 미련이 없는 법이니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캐나다에서 산불이 나면 빨리 불을 끄지 않고 뭐하냐 미국까지 몰려온다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일년에 한 두 번쯤 안부를 확인한다. 내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와 미래를 함께 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매사 견디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를 상처 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나도 똑같이 상처주는 법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랑을 절박하게 요청하는 소리지름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모든걸 그에게서 배우게 되어서 그는 행복할까? 내가 이제야 깨닫게 되어서 열받을까? 그 시간을 의미있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이제는 딱히 상관이 없을까.

 

얼마 전 너무 힘들때 연락해서 내가 나쁜 여자친구였다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딱히 그렇지 않았다고 좋은 여자친구였다고 했다. 자기도 그 때의 힘듦이 있었다고. 스스로 무감각하게 만든 시간은, 그 때 함께 있던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꾸 생각나고 자꾸 아쉽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이상의 다른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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