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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Jul 28. 2019

존재한 적 없는 세계로 내몰렸다

여행 소회 (19) - 영국 런던 02



길가에 무심하게 놓인 투박한 고딕체의 간판이 우릴 맞았다. 사람들은 가게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바.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한 동네 주점 같아 보여서 조금 당황한 채로 키가 작은 철제문을 통과했다.



곧, 나는 내가 존재한 적 없는 세계로 내몰렸다. 동굴이 있었고, 그 벽에 촛불이 일렁였다. 강렬한 마주침에 옛 연인을 만난 듯 조심스러웠지만, 기쁨에 몸이 살짝 떨렸다. 놀라운 지하 세계의 분위기가 우리 자매를 쉽게 들어 안았다. 동굴의 벽마다 와인바의 역사를 읊조리는 액자들이 빼곡했다.



주문을 받아준 긴 곱슬머리의 남자는 우리에게 이 곳이 처음이냐며 묻고는, 친절하게 몇 가지 와인을 시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루비. 보석의 이름을 딴 레드와인이 선택됐다. 여왕의 보석은 혀에서 식도까지 꽤나 성급하게, 하지만 달콤하게 밀려들었다. 상처 없이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붉은 보석을 우리는 한 차례 비우고 한 번 더 받아 들었다. 날아갈 듯 설렜지만, 담아드는 것이 많아 점점 더 무게감이 느껴지던 우리의 여행처럼 컵 안의 와인은 불빛을 받아 계속해서 번쩍였다.



늦은 점심도 해결하기 위해 갔던 것이라 거친 바게트와 부드러운 치즈도 함께 였다. 탁월한 마리아쥬에 뇌에서 화려하고 거대한 불꽃이 숨 막히듯 쉬지 않고 터졌다. 환상적인 오찬이었다.



온몸이 붉게 젖어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생각의 저편에 깊이 묻어둔 마음까지 파내어 서로에게 다정하게 내보였다. 삶의 가장 근거리에 살았지만 눈뜬 채로 놓쳐버린 뜨거운 애정.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캐치볼 하듯 가볍게 툭툭 주고받았다.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의 심연과도 같은 우애를 난 그때서야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상관없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있었고, 동굴은 어두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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