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도영 Mar 17. 2019

나는 아무 말 않고 그냥 웃었다

여행 소회 (4) - 대한민국 제주 04

제주 혼자 여행의 마지막은 역시 걸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걸으려고 간 여행이었다. 걸음 하나하나 마다 몸에 쌓인 독소를 빼고자 갔던 순례 여행이었으니. 길은 길이었는데, 달리는 차마저 드문 인적 없는 길을 나는 겁도 없이 걸었다. 휴대폰 지도로 대충 감을 잡으며 카멜리아 힐로 향했다. 갑자기 버스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아가씨, 아까 내려가는 길에도 걷고 있는 거 봤어. 돈 안 받을 테니 얼른 타!


안 탄다고 기사님이랑 실랑이를 하다가, 그래도 걱정해 주시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졌다. 기사님은 대단하다며 허허. 하고 웃으며 만족스럽게 버스를 출발시켰다. 버스가 데려다준 카멜리아 힐에서 동백 구경을 실컷 한 뒤에 나는 또 걸었다.



나는 걸으면서 자유로웠다.


바람소리가 세게 귓가를 치고 지나갔다. 내 사진을 찍자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표정이 나왔다. 환하게 웃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 바람 같이 가벼운 표정 같아 속으로 으쓱했다.


태워드릴까요?


그쯤 작은 차가 서며 젊은 가족이 물었다. 괜찮다고 웃으며 보냈다.



안녕!


개가 짖길래 인사를 했더니 꼬리를 흔들더라. 똑똑하니 예뻐서 조금 더 눈을 맞추고 떠났다.

곧 방주교회와 본태박물관에 도착했다. 두 곳 모두 걸어 도착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제주의 자연을 잘 활용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현명함이 돋보였다.
박물관 뜰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며 오전에 시장에서 산 오메기 떡을 조금 먹고 다시 일어섰다. 내가 마치 대단한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확실히 서울에서와 조금 달랐다. 삶을 유쾌하게 살 비용을 용감하게 치르는 것 같았다.



다음 날도 역시 걸었다. 이 날은 조금 지친 나를 위해 그리 멀지 않은 항구 근처를 떠돌았다. 앉았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바다 내음을 찾았다. 독립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진을 찍고 혼자 들떴다가, 순간 상호가 욕인 줄 알고 본 해장국집 앞에서 괜히 피식 대기도 했다. 이 날 나는 이때의 제주 여행이 몇 년, 아니 살면서 가장 소중한 여행으로 기록될 것이라 글을 남겼다.

물론 나는 이 뒤로도 꽤 감사할만한 여행을 몇 번 더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때의 제주 걷기는 내가 조금은 어른다운 30대로 향하는 분수령이 됐다. 제주를 다녀온 나와 그 전의 나는 달랐다. 혼자서 치른 성인식 같았다.


팀장님, 뭔가 변했네요. 맑은 기운이 나요.


서울로 돌아간 뒤 출근한 월요일. 바로 외근이 있어 밖에서 만난 고객사 과장이 칭찬을 했다. 나는 아무 말 않고 그냥 웃었다. 방주교회로 향하는 이름 모를 국도에 서 있는 것처럼.
이전 03화 어머니, 정식 하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