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잊혀져 가는 역사
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원래 사이공에서 찾을 무덤은 레 반 주엣의 것 뿐이었다. 사이공이 쟈딘(가정)이던 시절, 그러니까 응우옌 왕조에서 남방을 안정시킨 기둥인 그만이 사이공에서 찾아볼 만한 영웅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을 바꿔준 건 베트남에 가져간 책 한 권이었다.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가 바로 그 책이었다. 유연한 사관과 박학한 지식, 매끄러운 글솜씨는 베트남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아는 나 같은 이에게 자극이 되기 충분했다. 나는 그가 손꼽은 인물 보 따인을 찾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여태 그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살았단 게 크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베트남의 역사는 남부를 향한 북부의 팽창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캄보디아로부터 쟈딘을 빼앗은 것도, 동해안에 이어 남해안으로 진출한 것도, 베트남공화국을 패망시키고 사이공을 호찌민시티라 명명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이해했었다. 그런데 베트남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토를 확보한 건 19세기 초 응우옌 푹 아인의 응우옌 왕조 때가 처음이다. 베트남 전토에 대한 첫 통일을 남부가 이룩한 것이다. 그걸 가능케 한 이가 보 따인이다.
독립해 일군을 이끌던 그는 시암으로 토꼈던 응우옌 푹 아인에게 귀의해 쟈딘과 남방을 수복했다. 이어 중부로 진출해 요충지인 뀌년성까지 함락시킨다. 그는 계절풍을 이용해 수군과 육군을 병진할 줄 알았다. 바람을 등질 때면 공세를, 바람이 꺾이면 수군을 물린 뒤 수성에 전념했다. 보 따인은 수년 만에 중부 총독이자 대장군 자리에 올랐고 그의 부대도 갈수록 불어났다.
그로부터 몇년 지나지 않아 그는 뀌년성 팔각정에서 폭약에 불을 붙여 자결한 것이다. 떠이썬의 명장 쩐 꽝 디에우와의 2년 여에 걸친 농성전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쩐 꽝 디에우에게 편지를 보내 죽음은 장수의 몫이니 병사들을 보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제 무기를 항복의 징표로 넘겼다. 두 명장의 싸움은 쩐 꽝 디에우의 승리로 끝났으나 응우옌 푹 아인은 베트남 전토를 얻고 쟈롱황제가 되었다. 보 따인이 떠이썬의 정예를 뀌년에 붙들어둔 덕이었다. 뀌년을 버리고 푸쑤언을 치라는 보 따인의 계략은 제게는 죽음을, 나라엔 통일을 가져왔다.
최 교수는 쟈롱이 칼을 대지 않고 보 따인을 죽인 게 아니냐 의심한다. 쟈롱의 행각을 보면 참으로 타당한 이야기다. 보 따인은 나라 안 모든 병사의 존경을 받는 명장이었고 응우옌 푹 아인은 빛나는 이를 곁에 두지 못하는 찐따로 살다 죽었다. 포위가 풀리면 나라 제일의 영웅이 될 보 따인을 구원할 리 만무했다. 보 따인은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버틴 뒤 자결을 택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제 죽음으로 가장 낮은 병졸까지 살리려했다. 부장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응오 퉁 차우는 그를 홀로 죽게 두지 않았다. 쩐 꽝 디에우는 둘의 장례를 치러주고 항복한 병사 모두를 살려주었다. 자유롭게 제 길을 선택하도록 하였으나 배신자가 나오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보 따인과 응오 퉁 차우의 무덤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지인들 중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베트남어로 쓰인 기록을 찾아 영어를 할 줄 아는 이에게 물어 겨우겨우 찾을 수 있었다. 배움이 작지 않은 사람들도 이들을 모른단 게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프랑스 식민시대로 이어지는 응우옌 왕조의 역사가 자랑스럽지 않기 때문일까, 떠이썬과의 전쟁이 현 관점에선 같은 민족끼리의 내전으로 비춰지기 때문일까, 북방 주도의 현 베트남 시각에서 남방주도의 통일이 못마땅해서일까.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 따인과 응우옌 왕조의 역사가 오늘날 베트남에서 소외받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무튼 나는 사이공 푸누안 지구에 마련된 보 따인 묘와 사당을 찾았다. 쟈롱의 명에 따라 마련된 이곳은 실은 가묘다. 완전히 불타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탓이다. 뀌년성터에 먼저 마련된 가묘가 보다 그에게 가까울 것이 분명했다. 그곳엔 응오 퉁 차우도 함께 있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찾는 이 하나 없는 이곳을 떠나며 나는 차행선지를 뀌년으로 삼겠다 결정하였다.
2022. 9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