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걸고 위험으로 뛰어든 이들
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이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카파는 그렇게 적었다. 베트남 타이빈에서 지뢰를 밟지 않았다면 그가 구상한 사진집 <쓴 밥(Bitter Rice)>이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았을 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것을 내 서재에서 꺼내 보고 이따금씩 그를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건 결코 아름다운 일이 되지 못했다.
그가 1954년 5월 25일 지뢰를 밟았다.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이 프랑스를 박살낸 직후였다. 84년 간의 식민통치를 연장하려 재차 진주해온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들어가는 입구인 디엔비엔푸에 요새를 파고 농성했다. 수많은 전투를 거쳐 정규군화한 베트민 보병대가 보 응우옌 지압의 지휘 아래 디엔비엔푸로 속속 모여들었다.
당대 프랑스의 정예를 일점에 모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의 패배를 내다보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기 베트민군은 낡은 무기를 들고 각개전투만 하는 농민 게릴라가 아니었다.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르는 이제 막 정규군이 된 부대였다. 호찌민은 지압을 신뢰했고 지압은 그에 부응했다. 프랑스는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인도차이나를 포기한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동조한 미국 군부는 물자지원을 넘어 원자폭탄 직접 투하까지 생각했으나 현실화되진 않았다. 대신 그들은 몇년 뒤 통킹만사건을 조작하고 침탈전을 개시한다.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대항하는 장면을 놓치려 들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짓밟혔던 이들이 나치 패망 뒤 대륙 건너로 가 또 다른 폭압을 저지르는 걸 그는 참을 수 없어했다. 그는 스페인과 노르망디, 한국을 찾은 때와 같은 마음으로 베트남에 섰다.
카파가 베트남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나. 진군하는 탱크들 사이로 수확하는 농부들이 있었다. 카파는 예민한 작가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안엔 제국과 자본이 끝내 이해하지 못할 삶에 대한 진실이 깃들어 있었다. 전쟁 가운데 수확하길 멈추지 않는 그 역설적 상관관계 속에서만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과 그를 위협하는 야만성을 한꺼번에 목도한 뒤 수첩을 꺼내 'Bitter rice'라고 적었을 테다.
대학생 시절 청탁받은 어느 글에서 나는 카파의 삶에 대해 '인류가 낳은 고아가 제 부모를 고발하는 여정'이라 적었다. 기형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태생인 그는 학생운동에 관여했다 독일로 망명했다. 그러나 독일은 히틀러가 득세하며 점차 우경화했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이주한다. 그런데 프랑스는 전화에 휩싸이고 이내 독일에 점령된다. 그는 스페인으로, 중국으로, 한국과 베트남으로 그야말로 전 세계를 떠돌았다. 그리고 겨우 마흔 살, 젊은 나이에 행군 중 지뢰를 밟고 폭사한다. 베트남이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여전히 그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사이공의 전쟁박물관은 두 차례 인도차이나 전쟁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보러 온 건 전쟁이 아닌 사람이다. 나는 카파를 만나러 왔다. 카파를 만나러 이곳을 찾는 건 그가 전 세계에 따로 고향이라 할 곳을 두지 못했고 그리하여 그를 제대로 기리는 장소 하나 갖지 못하고 죽은 탓이다. 그리고 여기가 카파를 그나마 가장 잘 기억하게 이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3층 전시실엔 수많은 카파들이 있다. 헝가리계 이름을 버리고 가명을 쓴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만이 아니라 전쟁 가운데 사망한 수많은 언론인의 초상과 작품이 관람객들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두 차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죽고 실종된 언론인만 백수십 명에 이른다. 그중 쉰일곱의 사망자와 열일곱의 실종자 초상과 사진이 여기 걸려 있다. 베트남과 미국, 프랑스, 일본, 호주,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스위스, 싱가포르, 캄보디아의 많은 언론인이 당대 제국주의 침탈전 가운데 사망했다. 생을 걸고 위험으로 뛰어든 이들, 내게는 그들 모두가 하나하나의 로버트 카파다.
2022년 여름 사이공, 나는 존경의 마음으로 수많은 카파들과 만났다.
2022. 9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