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떻게 잘라드릴까.
양아치처럼 잘라주세요.
양아치처럼?
뉘집 새끼길래 이렇게 하고 다니나 그런 소리 나올 정도로요.
그게 뭔...
삼십이번이요.
유리벽에 붙은 대가리들 가운데 서른 두 번째, 말하자면 두상을 좌우로 나눠 왼편을 빡빡 밀고 거기에 칼집까지 좀 넣은 스타일을 가리킨다. 사각사각 가위질이 시작되고 나는 언제나처럼 의식을 놓아버린다.
빌어먹을 이 여자는 언제까지 남의 꿈자리를 어지럽히려나. 이제는 나오지 않을 때도 되었는데. 마스크 안으로 흘러내린 침방울을 훑어가며 자세를 고쳐 앉아 거울을 바라본다. 정신이 아직 혼미한데 할배가 호들갑을 떨어댄다.
이야 정말 잘 생겼어, 우리집 손님 중에 인물이 제일이야.
이거이거 또 시작이다. 평균나이 칠십은 족히 되는 이 후줄근한 이용원에서 최고소리 들어봤자 남는 것이 없다. 거기다 마스크까지 썼는데 아무 말이라도 고민을 하고 해야지 말이다. 무어라 받아칠지 생각하는데 옆에서 불쑥, 꼭 학생 같다니깐, 하고 끼여든다. 난로 앞에 앉은 이 할망구는 물가 좀 올랐다고 이용원의 상징이자 정이며 복지인 요구르트를 없애버린 구두쇠인데 어차피 돈도 안 들겠다 할범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동네 바보 호구라면 헤벌레 하겠으나 나도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이 아닌가. 이 노인네들이 칭찬을 쏟아내는 이유야 빤하디 빤한 수작이다.
삼십이번은 완전히 실패했다. 실패는커녕 시도조차 안 한 게 분명하다. 할배의 패션이며 고집이 맘에 들어 다니기 시작한 이용원이다만 그것도 어디 적당할 때 얘기지. 매번 원하는 스타일을 물어놓곤 기분내키는 대로 잘라대니 어떻게 고운소리가 나올까. 지난번엔 팔번 귀공자를 골랐고 그 전에는 십일번인가 십이번인가 기생오래비를 택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무슨 차인지를 모르겠다. 누가봐도 이건 일번 회사원 아니면 이번 중학생이다. 호이호이 하니까 둘리로 본다는 말이 딱 이짝이지 않은가. 장유유서를 아는 나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숙고 끝에 입을 열어 아니 이게 양아칩니까 정중히 문의한다.
그러자 영감탱이 가라사되, 이거이거 어른한테 말하는 뽄새보소 양아치가 여깄고만,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깨달음이 쓰나미처럼 몰려든다. 양아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자세였던 것이다. 이 늙은 양아치에게 나는 또 당하고야 말았구나.
거 책에 사인 좀 해두지 하는 할배를 향해 나는 다음부턴 미용실에 갈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자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할배 말하기를 에이 젊은친구가 불알 쪼그라드는 소리하네 하는 것이다. 섬세한 나는 황망하여 무어라 쏘아붙일 말도 찾지 못한다. 다 늙은 할망이 뭐가 그리 재밌다고 까르르 웃어댄다. 세숫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삽살개 목욕시키듯 벅벅벅 문지르다가는 미용실가면 불알 떨어진대 하고 히히히 웃어댄다. 눈으로 코로 비눗물이 들어와서 나는 입으로 후후 하고 바람만 불어댄다. 진짜 내가 다신 여길 오나봐라. 아득바득 이를 갈며 계산대 앞에 섰던 것인데 염색도 좀 하고가지 처자들 다 도망가겠어 소리가 닥쳐온다. 다른 할배를 이발하던 할배가 돌아보지도 않고 서서 흰머리가 문제가 아니야 대머리가 되겠어 이 샴푸나 사가라고 말을 얹는 것이다. 전국 무슨 이용사협회 추천 탈모 어쩌고 샴푸라 쓰인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쯤되면 고마울 정도다. 이렇게까지 정을 떼주다니.
사람을 잘못봐도 어지간히 잘못봤구나 후회 막심이다. 셔츠에 넥타이 매고 광낸 구두 신는다고 모두 신사며 장인일 수 없다. 카드도 안 받고 현금만 챙기는 이 할배할매야말로 노인의 얼굴을 한 양아치가 분명하다. 다시는 이 양아치 소굴을 찾나봐라 다섯번째인가 여섯번째인가 새롭지도 않은 각오를 다져본다. 그나저나 다음엔 십칠번을 해야하나 십구번을 해야하나.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