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극복 프로젝트
갱년기 극복 프로젝트 - 아침 만보 걷기
곧 갱년기에 접어든다 접어든다 준비해라 준비해라 라는 은근한 심리적 압박이 느껴지는 나이다. 사실 아직 나는 갱년기를 느낄 만한 어떤 징후는 없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갱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재촉받는 나이다. 어떤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어림에도 불구하고 벌써 갱년기 진단을 받고 우울해했다. 뭔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가는 된통 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탓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유튜브를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갱년기는 40대에 했던 운동량에 따라 극복의 난이도가 결정된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쉽게 넘어가려면 운동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일단 몸무게를 좀 줄여야겠지?. 유튜브에는 홈트니, 팻 버닝이니, 타바타 운동이니 등등의 다양한 정보들이 넘쳐났다. 체중 감량은 나만의 화두는 아니었구나.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만보 걷기를 하고 있는 중년의 유투버를 보게 되었다. 걷기라.. 음… 괜찮지. 뛰는 것도 아닌데 뭐. 내 도가니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고 시간도 넘쳐나는 나에게 딱인 운동. 그래 너로 정했어.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만보 걷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만보 걷기를 나서며.
아침 6시 반쯤 일어나 찬물에 세수를 하고 몸통 돌리기를 100번쯤 한 후 갑상선 약을 한 알 먹고 두꺼운 스포츠 양말을 꺼내 신는다. 내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는 남편 얼굴을 한 번 일별 한 후 방을 나선다. 얼굴에 선크림을 허옇게 도포한 후 물과 핸드폰을 넣은 작은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핸드폰의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장착한 다음 현관문을 나선다. 듣는 음악도 날에 따라 다른데, 처음에는 나의 20대를 풍미했던 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추억에 빠져 정신없이 걷는 날도 있었다. 때론 조용한 바흐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나름 세련된 산책길을 걸어 보기도 했다. 영어 라디오를 들으며 운동과 영어 공부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보려던 날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저 길을 걸으며 듣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제일 낫더라 싶어 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자연스레 들으며 걷곤 한다.
만보를 걸으면서.
보통 한 7,8킬로미터쯤 걷는다. 동네 옆에 있는 작은 연못 주위를 둘러 난 산책길을 걸어 들어가 꽥꽥 수다를 떨며 아침 몸단장에 여념이 없는 오리들을 만난 후 산책길을 빠져나오면 등줄기에선 어느새 땀이 촉촉하다. 다음 코스는 축구장 트랙 돌기. 커다란 축구장 몇 개를 붙여 놓은 것만큼 큰 운동장이 있고 그 주위에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트랙이 뺑 둘러 있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나처럼 그저 슬렁슬렁 걷는 사람들이 꽤 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 모르는 얼굴 들이었는데 한 달이 다 되어가니 규칙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낯이 많이 익었다. 눈이 마주치거나 뒤에서 나를 앞지를 때면 놀라지 말라는 듯이 살짝 굿모닝을 웅얼거리며 지나가는 게 아침 산책러들의 불문율. 안 나오면 궁금할 정도의 만보 메이트들도 얼추 여럿 생겼다. 엄청 빠른 걸음으로 걷는 중국인 부부, 항상 산악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달리는 커플, 부시맨처럼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달리는 다리 짧은 아저씨, 마라톤 대회 기념 티셔츠를 입고 달리는 마라톤 맨, 초딩 아들 둘을 밀고 끌며 달리는 엄마, 엄청난 거구를 이끌고 우울한 얼굴로 천천히 걷는 중년의 아주머니. 송아지만 한 개 두 마리를 앞세우고 마차 몰듯 끌려가는 아저씨. 이제는 낯이 익어 눈인사 뿐 아니라, 가볍게 굿모닝을 나눌 정도의 가까운 만보 메이트들이다.
그 트랙을 절반 정도 걷다 보면 숲 속 오솔길로 들어가는 예쁜 입구가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숲 속 산책로이기 때문에 햇빛이 차단되어 아주 시원하고 상쾌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우리 집에서 이 산책로까지 한 삼천보를 걸어야 당도할 수 있으니 거기에 이를 즈음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아침 햇살을 가리느라 썼던 모자를 벗어 제끼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혀 준다.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산소 가득한 공기의 신선한 향과 알 수 없는 다양한 새들이 저마다 짹짹 대며 산책로로 들어선 나를 반겨준다. 강렬한 햇빛으로 피곤했던 눈도 초록이 주는 편안한 조명 속에서 휴식을 누린다. 정말 이 맛에 아침마다 꿀잠 마다하고 걷고, 누구라도 여기로 초대하여 이 신선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만보 걷기의 진정한 장점.
이러한 모든 것이 만보 걷기의 장점이다. 하지만 내 몸의 건강을 위해 시작했던 만보 걷기의 진정한 장점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위로와 격려로 마음이 단단해지고 건강해지는 것이다. 갱년기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버린 시간 속에 홀로 서 있는 불안한 존재감 때문에 우울해진다. 자식과 남편, 가정 건사, 주변 관계 관리 등으로 소모되어 온 인생이지만 나만을 위해 바쳐진 시간들은 거의 없었던 듯하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를 늙은이의 반열로 점점 밀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뭔가 도전해야 할 마지막 순간에 놓여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뭘 도전하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도 같은 자포자기의 순간으로 치닫기도 한다. 이리저리 우왕좌왕 갈팡질팡... 진정한 질풍노도의 시기는 사춘기가 아닌 갱년기가 아닐까.
사실은 뭔가를 도전해도 괜찮고 다 내려놓고 편하게 살아도 괜찮은 나이인데 왜 이러는 것일까. 그런데, 아침마다 걷다 보니 마음이 진정이 된다. 한결 정리가 된다. 붕 떠다니는 부유물들이 걸음을 뗼 때마다 서서히 차분히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거의 한 시간 반을 걷다 보면 내 인생의 기승전결이 다 떠오른다. 10대, 20대, 30대, 40대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직도 여전한 내 인생의 걱정, 근심 아니 이제는 내가 아닌 내 자식들에 대한 걱정 근심까지 떠올라 불안해진다. 하지만, 계속 걷다 보면 이상하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다 지나간다.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이런 마음이 스며든다. 자연이 주는 위로일까. 격려일까. 이 힘을 얻기 위해 힘들어도 피곤해도 비가 와도 해가 이글거려도 아침마다 길 위에서 위로를 받으려 집을 나선다.
만보 걷기를 끝내고 집으로…
어느덧 많이 온 것 같다. 하지만 더 걸어갈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 지점에서 만보기를 꺼내 본다. 내가 어느 만큼 걸어온 걸까. 어느새 오천보를 넘게 걸어왔다. 여기서 더 걸어가면 더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면 아직도 힘이 철철 넘치는 느낌이니까. 하지만 더 욕심을 냈다가는 다시 돌아올 때 너무 지쳐버릴 것이다. 며칠 전에 가는 길이 너무 좋아 돌아올 것을 가늠 않고 육칠천 보를 걸어갔다가 집까지 돌아올 때 너무 지쳐 후회 막급했던 생각이 났다.
‘그래, 이 정도까지다. 여기까지 온 것도 너무 좋았어. 이제 돌아갈 힘도 남겨야지’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다. 나오는 길에서도 느지막이 나온 만보 메이트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새는 여전히 짹짹거렸고 피톤치드와 숲의 향기도 여전했다. 다만 햇살의 고도만이 좀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으니까 당연한 거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점점 지쳐 가는 내 몸과 발을 끌고 댕겨 걸어가야 한다. 아까 같은 신선함도 이제 더 이상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곧 시원한 물에 샤워하고 얼음물 한 사발 들이켤 생각으로 힘들어도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이제부터는 정신력이다. 쉼을 희망하며 걷는다. 집에 거의 당도할 무렵에는, 아이고, 더 걸을래도 더 걸을 힘도 없고 더 걷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어서 시원한 물 한잔과 샤워 한 판만을 기대하며 들어선다.
‘아, 오늘도 수고했다. 잘했어. 이제 편하게 쉬어야지. 오늘도 만보 걷기 한 번 잘했네.’
‘이렇게 힘들게 걸었으니 난 쉴 자격이 있어. 맛있는 달달 커피도 한 잔 마실 자격도 있다구.’
나의 중년, 그래 좀 쉬어 갈 자격 충분한 나이다. 그렇다고 허무해 하면서 퍼질러 있을 필요는 없다. 꼭 뭘 이루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까지 달려온 나에게 좀 쉬어가도 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그것을 해도 괜찮은 나이라고 다독임을 받고 싶다. 그리고 이제 아침일 뿐이다. 오늘 하루는 이제 시작이다. 생각보다 하루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