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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y 17. 2019

흔적을 남기지 말고 떠나라

느리게 변한다는 것, 남는다는 것, 남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연어를 보내는 의식


 한적했던 공원이 사람들로 북적거릴 때가 있다. 오늘은 양식장(Tynehead Hatchery)에서 부화시킨 연어 치어를 방생하는 행사가 있다. 민물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자라고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일생, 그 시작을 함께할 수 있다. 연어가 회귀하는 계절, 연어 낚시를 하러 가면 조금은 낯선 풍경을 접하게 된다. 낚시꾼들이 잡은 연어를 강에서 직접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강물에 그대로 흘려보낸다. 칠리왁 강에는 죽은 연어의 부산물을 먹기 위해 갈매기들이 모인다. 아마도 비슷한 가치관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잡은 연어의 크기가 작거나, 잡을 수 있는 개체 수를 채웠을 때는 다시 놓아준다. 잡은 연어를 다시 놓아줄 때는 숭고한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다. 연어의 꼬리를 손으로 잡고 지느러미를 흔들며 같이 물살의 흐름을 탄다.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인 연어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물살을 견디도록 돕는 것이다. 연어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면 왠지 가슴이 뛴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방식


 흔적을 남기지 말고 떠나라. 캐나다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벌써 산딸기가 달렸다. 먹으면 소변 줄기가 강해져서 요강을 뒤집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복분자다. 생명력이 좋아서 공원 전체를 산딸기 밭으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빠르게 번진다. 공원 관리인들이 나서서 줄기들을 솎아내기도 한다. 산딸기라고 불리는 야생 블랙베리는 곰을 비롯한 야생 동물의 먹이다. 산책길에 빨갛게 익은 열매를 보면 한두 개쯤 따먹게 되는 새콤달콤한 유혹을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커다란 통을 들고 와서 야생동물의 먹이조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따버리는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곰이 자연에서 먹을 것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곰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인간의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 공원에 곰이 출현하면 쓰레기통이 가장 먼저 바뀐다. 철제로 만든 쓰레기통은 손을 넣고 버튼을 눌러야만 열 수 있다. 곰은 쓰레기통을 뒤집을 수도 없고 발바닥을 넣어 열 수도 없다.  곰이 쓰레기통을 뒤지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는 공원이나 집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발명이다.

 


 어떤 모습일지라도 자연으로 남아 자연이 되는 모습


 바람이 숲을 가로지르는 속도가 빨라지는 날에는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지기도 한다. 길을 걷다가 커다란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던 날은, 부러지는 것들과 추락하는 것들의 소리가 소름 돋도록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가 얼마나 빠르게 나를 덮치고 지나갈 수 있는지를 상상했다. 뿌리째 뽑힌 나무가 길을 막고 눕기도 한다. 공원 관리인들이 나무를 치우는 법이 신기하다. 전기톱으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서 길옆 숲에 던져놓는다. 딱, 길을 막고 있는 만큼만 잘라낸다. 최대한 나무가 쓰러진 그대로 보존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만 치운다. 쓰러진 나무를 볼 때마다 안쓰럽고 민망하고 불쾌한 감정들이 정리되지 않아서 눈길을 피했다. 톱으로 잘라놓은 나무의 나이테를 세 본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나무의 나이테는 일 년에 한 개 이상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수백 년을 버티고 살아온 원시림의 나무들이 그토록 허무하게 뽑힐 수 있을까. 무엇을 버텼고 무엇을 버티지 못했던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무들은 뿌리를 깊게 내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모진 바람을 견디기 위해 뿌리를 더 깊이 내리거나 충분한 물을 찾기 위해 뿌리를 뻗어서 땅 속을 헤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익숙하게 견딜 수 있는 바람만 불었고, 늘 적당한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비옥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바람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바람을 견딘 만큼 더 단단해질 것이라는, 흔들리면서 더욱 견고해질 것이라는 위안이 필요하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천천히 썩고 있는 나무를 볼 때마다 느리게 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쓰러진 나무 위에 이끼가 끼고, 이름 모를 들꽃이 피고, 다람쥐의 길이 되는 순간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숲이 나에게 준 축복이었다. 어떤 모습일지라도 자연으로 남아 자연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묻는다.


 치열한 삶의 현장, 맨해튼의 도시설계자였던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에게 만약 맨해튼의 중심부에 큰 공원을 설계하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똑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라는 누군가의 조언은 뉴욕 센트럴파크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숲은 나에게 쉼표이다. 숲은 나에게 안식과 같다. 타인헤드 공원(Tynehead Regional Park) 숲 한쪽에 커다란 그루터기가 있다. 크기만으로 수백 년의 나이를 먹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어느 세월엔가 벼락을 맞았을 것이다. 속부터 서서히 타들어 갔을 나무는 숱처럼 그을린 밑둥치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고도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묻는다.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이다. 놀이터가 되고, 체험학습장이 되고, 누군가의 사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남는다는 것, 남긴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루터기에 또 다른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루터기에 이름 모를 풀 하나가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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