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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Apr 20. 2020

작고 안락한 세계

나만 오롯이 남은 공간에서

 세상은 다양하고도 다양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된다. 이쯤 되면 내가 이상한지 세상이 이상한지 헷갈린다. 세상이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이상한 세상이 타인들에게 보편적이라면 주류를 좇지 못하는 내가 이상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이상하든 내가 이상하든 지쳤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결심했다. 쉬자. 개인은 전체보다 우선하고 개인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체가 진정한 공동체다. 진정한 공동체를 이룩하기 전에 개인이 건강해야 다. 과부하된 뇌를 멈추고 작은 세계로 들어갔다.


 이 곳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날에는 몸을 먼저 살핀다. 기분은 어떠한지, 배는 고픈지, 피곤하진 않은지. 첫 단계에서 수정사항이 발견되면 탐색을 종료한다. 쾌적한 환경이 준비되어도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의미 없으니까. 배가 든든하고 눈꺼풀이 가벼워지면 다시 몸에게 질문한다. 머리가 얼마나 시끄럽니? 머리가 와장창거리는 날에는 유튜브에서 멍하니 볼 수 있는 영상을 찾는다. 잡념을 없애고 싶으면 집안일을 하거나 수세미를 만든다. 골똘히 집중이 필요할 땐 책을 꺼낸다. 머릿속 백색 소음이 적당하고 새로운 정보를 수용할 수 있다면 영화를 본다. 마음이 포근해지고 온 몸에 얇은 막이 둘러싸이는 기분. 안락하다, 고 느낄 때까지 위 알고리즘을 반복한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에서 주디는 저녁이 찾아오면 모든 활동을 멈춘다. 방문 앞에 타인의 출입을 금하는 표지판을 걸어두고 포근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소유하고 있는 모든 쿠션들을 한데 모아 의자를 푹신하게 만들고 그녀가 하는 일은 독서다. 저녁의 주디는 학생, 벗, 발신자도 아닌 그냥 주디가 된다. 독서를 맘껏 하는, 그냥 주디. 오랜만에 본 책에서 사회로부터 잠시 안녕하는 자세가 읽힌다. 저녁 독서는 그녀에게 안락한 세계가 아니었을까.


 오늘도 작고 안락한 세계에 머물렀다. 세상이 이상하든 내가 이상하든 살아야 하니까.  날 선 감정과 흐려진 판단이 가득한 세상에서 늘 그렇듯 소우주로 들어갔다.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회와 잠시 안녕하고 있다. 동이 트면 각종 역할을 수행하고 범람하는 말들에 휩쓸리겠지만 어쨌든 이 작고 안락한 세계에 몸을 기대본다. 조금은 더 나아지길 기대하며. 내일도. 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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