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 '상식적이고 비상식적임'을 떠나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기준되면,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저 사람이 마음에 여유가 없구나, 저 사람은 지금 무언가에 눈이 멀었구나, 저 사람은 오랫동안 걷지 못한 사람처럼 진리를 보지 못한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지, 저 사람은 어릴 때 트라우마에 갇혀 아직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 저 사람은 자기만의 기준이 강해 다른 사람을 살피지 못하지?
…
상대방의 태도와 말, 상황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어떤 문제도 풀 수 없다.
무엇보다 내가 옳다 치더라도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에서 나는 똑같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은연중에 자기는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따지고 옳고 그름을 가리고 충고하고 가르친다고 결코 변하지 않는다. 관계만 악화될 뿐이다.
가르치기보다는 내가 싫어하는 반복된 상대방의 행위에 대해 이해와 함께 불편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부탁하며 해결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방법이 좋다.
천 번 만 번을 말하며 '내가 싫으니 고치라'는 일방적인 말은 이기적이다. 그 누구도 그런 방법으론 고치지 못하고 서로 신뢰만 잃고 관계만 악화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내게 '불편하게' 해석되면, 상대방의 '의도'를 물어보고 서로를 위해 양보해서 수정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방법은 아쉽게도 드물다.
사랑을 유리잔이라 치자.
각자에게 그 유리잔 한 잔씩이 있다.
'사랑'은 그 유리잔에 넘쳐흘러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이 잔에 다른 양의 사랑을 담고 있다.
이 유리잔의 물, 즉 ‘사랑’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마르지 않고, 끊임없는 샘물로 채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각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 '사랑'의 물을 채워야 한다. 오직 주님으로밖에는 얻을 수 없다.
충분히 물이, 즉 '사랑'이 채워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
그렇게 상대의 유리잔에 '사랑'이 차오르길 도울 때, 그때서야 상대가 변하고 나와 동등한 관계에서 내 말을 들어줄 수가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오랜 시간 채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사랑이 없는 사람을 채워주어야 한다. 상대에게 '사랑'의 채워짐이 생기면 그때서야 그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내게 '마르지 않는 샘물의 근원'을 궁금해할 때, 나는 그 존재가 ‘예수님’이라 확실하게 전할 수 있다.
그것이 '참 복음'이고 복음을 전할 ‘때’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나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 자립해서 주님께 '그 사랑'을 매일 채울 수 있다.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채워주게 되며 복음을 전한다. 우리 성도는 이것을 반복하며 천국의 시민권을 다 함께 나눌 수 있다.
성도라면,
더 이상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자.
따지려거든 내게 사랑이 있나 없나를 따지자.
없으면 주님으로부터 채우고 우리는 잔소리나 정죄대신 넘치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자.
그것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며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